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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은 혀끝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김치찌개 한 그릇에 담긴 감각의 연출법
  • 진익준 논설위원
  • 등록 2025-09-21 09:47:33
  • 수정 2025-09-25 15:2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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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사(이야기)’로 영혼을 불어넣어라
  • ‘시각(연출)’으로 주인공을 만들어라
  • ‘청각과 후각’으로 본능을 자극하라

[글로벌 외식정보=진익준 논설위원]



왜 어떤 김치찌개는 8천 원이고, 바로 옆 가게 김치찌개는 똑같은 국산 돼지고기를 썼는데도 1만 5천 원을 받을까요? 더 미스터리한 것은, 사람들이 그 1만 5천 원짜리 가게에 길게 줄을 선다는 사실입니다. 이분들이 미각을 상실했거나, 지갑 사정이 유달리 넉넉한 분들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혀와 지갑을 가졌지만, 우리와 다른 ‘경험’에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맛을 혀의 독점적 권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짠맛, 단맛, 신맛, 쓴맛, 감칠맛. 이 오미(五味)의 조합이 맛의 전부라고 믿는 순진한 ‘미각 지상주의’에 빠져있죠. 하지만 이는 세상을 평면으로만 보는 것과 같은 착각입니다. 인간의 뇌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맛은 혀가 보낸 데이터를 단순 접수하는 ‘민원 창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눈, 코, 귀, 피부 등 모든 감각기관이 보낸 정보를 종합해 최종 판결을 내리는 냉철한 ‘대법원’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훌륭한 요리사는 단지 뛰어난 셰프가 아니라, 고객의 뇌가 내릴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증거를 설계하고 연출하는 ‘경험의 총감독’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거창한 ‘경험 설계’라는 것을 어떻게 우리네 식탁의 가장 평범한 주인공, 김치찌개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돈 한 푼 안 들이고 말입니다. 비밀은 우리 몸에 붙어있는 다섯 가지 감각 센서를 제대로 활용하는 데 있습니다.



첫째, ‘서사(이야기)’로 영혼을 불어넣어라


이솝우화도 아니고, 찌개에 웬 서사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제주에 ‘우무(Umu)’라는 작은 푸딩 가게가 있습니다. 이 가게는 “제주 해녀가 직접 채취한 우뭇가사리로 푸딩을 만듭니다”라는 단 하나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이 단순한 서사 한 줄이 평범한 푸딩을 ‘제주의 거친 바다와 해녀의 땀방울이 담긴 의미 있는 조각’으로 바꿔놓습니다. 고객들은 푸딩만 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구매해 자신의 SNS에 전시하죠.


와인업계는 이 서사 비즈니스의 ‘끝판왕’입니다. 프랑스 보르도의 어느 샤토(Château) 와인 한 병에는 포도 주스 이상의 것이 담겨 있습니다. 수백 년 된 포도밭의 역사, 와인을 만들어 온 가문의 연대기, 그해의 유난했던 뙤약볕과 포도알을 괴롭혔던 폭풍우 이야기까지. 이 모든 무형의 서사가 더해져 한 병에 수백, 수천만 원의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포도 주스 원가만 따지면 절대 나올 수 없는 가격이죠.


이제 우리 김치찌개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 할머니가 6.25 때 피난 내려와…” 같은 거창한 서사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메뉴판 한쪽에 “작년 겨울, 해남의 찬 바람을 맞으며 1년 동안 숙성시킨 김장 김치로 끓입니다”라는 진솔한 문장 하나면 충분합니다. 이 문장 하나가 우리 가게의 김치찌개를 그냥 ‘김치로 끓인 찌개’에서 ‘시간과 자연과 정성이 담긴 요리’로 격상시킵니다.



둘째, ‘시각(연출)’으로 주인공을 만들어라


인간은 혀보다 눈으로 먼저 음식을 먹습니다. 시각 정보는 맛에 대한 기대치를 결정하고, 이 기대치는 실제 맛의 경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은 고리타분한 옛말이 아니라, 현대 뇌과학의 정수인 셈입니다.


서울 성수동이나 연남동의 이름난 카페들을 보십시오. 커피 맛?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당기는 것은 낡은 공장을 개조한 독특한 공간감, 인스타그램에 자랑하고 싶게 만드는 감각적인 조명과 인테리어입니다. ‘대림창고’ 같은 곳은 단순히 커피를 파는 공간일까요, 아니면 사진 찍기 좋은 ‘경험’을 파는 공간일까요? 답은 명확합니다.


세계적인 커피 브랜드 ‘블루 보틀(Blue Bottle)’은 미니멀리즘이라는 시각적 미학을 커피에 성공적으로 적용했습니다. 복잡한 메뉴판 대신 몇 가지 핵심 메뉴만 남기고, 화려한 장식 대신 차분한 공간을 연출합니다. 그리고 바리스타가 정성껏 커피를 내리는 모습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죠. 이 모든 시각적 장치는 “우리는 커피의 본질에만 집중합니다”라는 강력하고 고급스러운 메시지를 고객의 뇌에 직접 전달합니다.


김치찌개 역시 무대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충분합니다. 가게 전체 조명은 살짝 낮추고, 각 테이블 위로 따뜻한 색감의 핀 조명을 떨어뜨려 보십시오. 마치 연극 무대의 주인공처럼 김치찌개 냄비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됩니다. 다른 반찬 그릇보다 살짝 높은 받침 위에 냄비를 올리는 ‘높낮이’의 작은 변화만으로도, 우리 찌개는 식탁의 다른 구성원들을 압도하는 ‘주연 배우’의 아우라를 풍기게 됩니다.



셋째, ‘청각과 후각’으로 본능을 자극하라


소리와 향기는 인간의 이성을 거치지 않고, 기억과 본능을 관장하는 뇌의 가장 깊숙한 곳을 직접 타격합니다. 백 마디 설명보다 ‘치이익-’ 하는 소리 한 번, 고소한 향기 한 줄기가 훨씬 강력한 법입니다.


서점에 들어서는 순간 코끝을 스치는 그 특유의 종이 냄새를 기억하십니까? 교보문고는 ‘The Scent of Page’라는 시그니처 향을 개발해 모든 매장에서 사용합니다. 이 향은 고객들에게 ‘여기는 단순히 책을 파는 창고가 아니라, 지적인 사유와 편안한 휴식을 즐기는 문화 공간’이라는 신호를 무의식적으로 보냅니다. 책만 파는 게 아니라 ‘책 읽는 경험의 분위기’를 파는 것이죠. 영국의 코스메틱 브랜드 ‘러쉬(LUSH)’ 매장은 100미터 밖에서도 그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강렬하고 신선한 향기는 그 자체로 “우리는 인공적인 것과 타협하지 않는, 신선하고 활기 넘치는 브랜드”라고 소리치는 광고판입니다.


우리 김치찌개는 그 자체로 훌륭한 청각과 후각의 재료를 품고 있습니다. 찌개가 가장 맛있게 끓어오를 때 ‘보글보글’ 하는 소리에 고객이 잠시 귀 기울이게 해보십시오. “지금이 바로 김치와 육수가 만나 서로의 맛을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소리의 증거입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잘게 썬 대파나 마늘을 넣은 뜨거운 기름을 찌개 위에 둘러 ‘치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향을 폭발시키는 퍼포먼스는, 고객의 뇌에 ‘맛있다!’는 신호를 강제로 주입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넷째, ‘촉각(무게감)’으로 신뢰를 전하라


우리의 손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묵직함과 견고함은 곧 품질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가볍고 얇은 것보다는 무겁고 두툼한 것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더 높은 가치와 신뢰를 느낍니다.


‘애플(Apple)’이 왜 그토록 제품의 재질과 마감에 집착할까요? 스토어에 전시된 아이폰을 들어 올릴 때 느껴지는 묵직하고 차가운 금속의 감촉, 노트북을 열 때의 견고한 힌지의 움직임. 이 모든 촉각적 경험이 “이 브랜드의 제품은 비싸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견고하고 뛰어난 물건”이라는 인식을 우리의 손을 통해 뇌에 전달합니다. 고급 한식 레스토랑 ‘광주요’에서 사용하는 식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손에 착 감기는 묵직한 도자기 그릇과 방짜유기 수저. 이 무게감이 음식에 대한 기대를 한껏 끌어올립니다. 똑같은 설렁탕이라도 가벼운 플라스틱 그릇에 담아줄 때와, 묵직한 유기그릇에 담아줄 때 우리가 느끼는 가치와 맛은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매일 사용하는 얇고 가벼운 스테인리스 밥공기 대신, 손에 쥐었을 때 묵직함이 느껴지는 두툼한 도자기 밥공기를 내어주는 작은 변화. 이것이 바로 “우리는 당신의 평범한 한 끼를 소중하고 귀하게 여깁니다”라는, 백 마디 말보다 강력한 무언의 메시지입니다.



경험의 가치를 묻다


이 모든 것이 그저 허울 좋은 속임수나 상술에 불과한 것이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습니다. 천만에요. 이것은 고객이 지불하는 비용에 대해, 단지 혀끝의 즐거움을 넘어 오감 전체의 만족감으로 보답하려는 ‘총체적 정성’의 표현입니다. 같은 재료로 더 높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지혜로운 전략’이기도 합니다.


자,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당신의 김치찌개는 과연 얼마짜리입니까? 그 가격표의 숫자를 결정하는 것은 돼지고기 한 근의 시세가 아니라, 당신이 고객에게 선사하기로 마음먹은 ‘경험의 깊이’일 것입니다.



ikjunj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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