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5년 10월, 폐업한 '강혁 쿠킹 아카데미']
소주 병이 바닥을 굴렀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의 냉기가 척추를 타고 올랐지만, 강혁은 몸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눈은 텅 빈 강의실 한구석에 붙은 붉은색 압류 딱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강혁 쿠킹 아카데미’.
아버지의 평생이 담겨있던, 그리고 자신의 30대를 모두 갈아 넣었던 공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한때는 고소한 파 기름 냄새와 수강생들의 활기로 가득 찼던 이곳엔 이제 먼지와 알코올 냄새, 그리고 패배자의 한숨만이 가라앉아 있었다.
드르륵-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짧게 울렸다. 무심코 화면을 켜자, 푸드테크 관련 뉴스가 헤드라인을 채우고 있었다.
[뉴스] ‘로보틱 셰프’, 5성급 호텔 주방 상륙… “인간보다 정확하고 빠르다”
[뉴스] CJ ‘비비고’, 전 세계 HMR 시장 석권… “이젠 집에서 요리할 필요 없어”
[뉴스] AI ‘레시피 구루’, 사용자 유전자 분석해 맞춤 식단 제공…
“하… 하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10년 전, 그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무시했던 것들이었다.
“원장님, 우리도 원데이 클래스 같은 걸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근본 없는 짓이야. 요리는 자격증이 기본이야!”
“원장님, 유튜브 채널이라도 만들어서 우리 레시피를 알려야…”
“우리 비법을 공짜로 왜 풀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랬다.
강혁은 ‘근본’과 ‘전통’이라는 낡은 갑옷을 입고, 시대의 파도를 온몸으로 거역한 선장이었다.
그의 아카데미가 자랑하던 ‘한식조리기능사 최다 합격률’은 HMR의 편리함 앞에 무너졌다. ‘3대째 내려오는 비법 양념장’ 레시피는 AI가 수만 개의 데이터를 조합해 내놓는 ‘초개인화 레시피’ 앞에서 조롱거리가 되었다. 수십 년 경력의 강사님이 보여주던 현란한 칼질은, 지치지도 않고 똑같은 두께로 재료를 썰어내는 조리 로봇의 영상 앞에서 그 빛을 잃었다.
세상은 요리가 ‘의무’가 아닌 ‘선택’이 된 시대를 맞이했고, 강혁의 아카데미는 그 변화의 파도에 가장 먼저 집어삼켜졌다.
‘단 한 번만… 딱 한 번만 기회가 더 있다면….’
소주 기운과 함께 지독한 후회가 몰려왔다. 시야가 흐려졌다. 스마트폰 화면 위로 툭,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2025년 10월 10일 금요일 오후 3시, ‘강혁 쿠킹 아카데미’ 원장실]
똑. 똑. 똑.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칼질 소리에 강혁은 눈을 떴다.
“으… 머리야…”
숙취로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자신의 원장실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퀴퀴한 먼지 냄새 대신, 은은한 육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창밖은 눈부시게 밝았고, 강의실 너머로 왁자지껄한 수강생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무엇보다…
원장실 벽에 걸린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 2025년 10월 ]
“……?”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뺨을 때렸다.
짝!
“아야!”
꿈이 아니었다.
강혁은 벌떡 일어나 원장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강의실 안.
스무 명 남짓한 수강생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무를 썰고 있었다. ‘한식조리기능사 실기 대비반’. 10년 전,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바로 그 수업이었다.
강혁의 눈에 그들의 모습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처럼 보였다.
‘저 중에 반은 HMR이 더 편하다는 걸 깨닫고 요리를 그만두겠지.’
‘나머지 중 반은 유튜브와 AI의 레시피가 더 뛰어나다는 걸 알고 학원을 떠날 거고.’
‘그리고… 저들이 그토록 연마하는 저 칼질 기술은 결국 로봇에게 자리를 내주게 될 거야.’
미래에서 온 패배자의 눈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 명확하게 보였다.
세 명의 터미네이터.
HMR, AI, 그리고 로봇.
그 거대한 재앙이 이제 막 문을 열고 들어오려는 찰나였다.
“원장님,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 학원의 살림을 도맡아 하던 박 실장이 심각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녀는 강혁이 가장 믿고 의지했던 직원이었다. 10년 후 폐업하던 그 날까지,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
“왜 그러시죠, 실장님?”
“이번 달 자격증반 등록률이 또 15%나 떨어졌어요. 옆에 새로 생긴 ‘영진 아카데미’에서 수강료 20% 할인 파격 이벤트를 시작했더라고요. 우리도… 맞불을 놔야 하지 않을까요? 30% 할인이라도….”
과거의 강혁이었다면, 당연히 “그럽시다!”라고 외쳤을 것이다.
경쟁 학원을 이기기 위해 제 살을 깎아 먹는 출혈 경쟁. 그 끝이 파멸이라는 것을 모른 채.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은 10년 치의 실패 데이터와 미래에 대한 명확한 통찰로 가득 차 있었다.
강혁은 멍하니 서 있는 수강생들을, 그리고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박 실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다시는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이곳을, 아버지의 유산과 자신의 모든 것을 지켜내겠다고.
그는 나지막하지만, 그 어떤 때보다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요.”
“네?”
“할인 이벤트는 하지 않겠습니다.”
강혁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박 실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거대한 폭풍의 첫 조각을 꺼내 보였다.
“그리고… 다음 달부터 한식조리기능사 반은 전부 폐지하겠습니다.”
박 실장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강의실의 모든 소음이 멎는 듯했다.
강혁의 두 번째 인생이, 아니, ‘강혁 쿠킹 아카데미’의 진짜 반격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2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