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외식정보=진익준 논설위원]

프롤로그: 예측 불가능성을 향한 여정
토요일 오후 2시, 성수동 연무장길. 국내 모든 최신 유행이 집결한 듯한 거리 위로, 방향을 잃은 두 개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다른 한 손에는 방금 산 브랜드 쇼핑백을 든 채였다. 그들의 목적지는 이 대로변에 있지 않았다. 스마트폰 지도 앱은 이미 무용지물. 한 명이 인스타그램 DM(다이렉트 메시지)으로 받은 누군가의 문장을 나지막이 읊었다. “간판 없는 회색 철문, 페인트 가게 지나 바로 왼쪽 좁은 골목 끝.”
이것은 2025년 서울에서 펼쳐지는 가장 현대적인 ‘보물찾기’의 한 장면이다. 지시문은 불친절하고, 목적지는 숨겨져 있으며, 보상은 ‘나만 아는 곳을 발견했다’는 희열이다. 그리고 이 게임의 플레이어들은 기꺼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대체 무엇을 찾기 위해 이들은 반듯한 길을 벗어나 미로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가?
PART 1. 김 대리의 이중생활: ‘생존’에서 ‘탐험’으로
김진아(가명, 29세) 씨는 판교의 IT 기업에서 일하는 5년 차 대리다. 평일의 그녀는 분 단위로 쪼개진 스케줄과 끝없는 보고서, 정해진 KPI(핵심성과지표)에 맞춰 움직이는 전형적인 K-직장인이다. 점심 메뉴는 회사 근처에서 가장 빨리 나오고 ‘실패할 확률이 없는’ 식당으로 정해진다. 모든 것이 효율과 예측 가능성의 범주 안에 있다.
하지만 주말의 김진아는 ‘탐험가’로 변신한다. 그녀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 프로필에 ‘도시 탐험가 | 반짝이는 것들을 수집합니다’라고 적어두었다. 그녀가 말하는 ‘수집’이란, 남들이 모르는 공간을 찾아내고, 그곳의 이야기를 사진과 짧은 글로 기록하는 행위다.
“강남역이나 더현대서울 같은 곳은 편하죠. 동선도 명확하고, 뭐가 있는지도 다 알고요. 근데 반대로 말하면 전혀 설레지 않아요. 이미 모든 게 다 알려져 있잖아요.”
지난 토요일, 그녀의 목표는 40년 된 자동차 부품 공장을 개조했다는 한 카페였다. 유명 블로그나 미디어엔 아직 소개되지 않은 곳. 오직 몇몇 ‘취향이 비슷한’ 인스타그래머들 사이에서만 암호처럼 공유되는 곳이었다. 그녀는 낡은 공업사들 사이를 30분 가까이 헤맸다. ‘캉! 캉!’ 쇠를 두드리는 소음과 기름 냄새가 익숙해질 무렵, 그녀는 마침내 녹슨 회색 철문을 발견했다. 문고리조차 없는 문을 힘겹게 밀자, 거짓말처럼 다른 차원의 공간이 펼쳐졌다. 거친 콘크리트 벽과 육중한 쇠기둥은 그대로였지만, 그 사이를 채운 건 부드러운 조명과 커피 향, 그리고 나지막한 사람들의 대화 소리였다.
“바로 이 순간이에요. ‘찾았다!’하는 느낌. 마치 저만 아는 비밀의 문을 연 것 같잖아요.”
그녀는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마자 스마트폰을 들었다. 커피 잔을 찍는 게 아니었다. 낡은 공장의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빛줄기가 커피 위로 떨어지는 순간, 녹슨 기계 부품 옆에 놓인 스피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벽의 질감을 프레임 안에 담았다. 이곳에서 커피의 맛은 경험의 일부일 뿐, 본질은 이 공간이 품은 시간과 이야기를 ‘발견’하고 ‘소유’하는 행위에 있었다.
PART 2. ‘진정성 결핍’ 시대의 새로운 생존법
김진아 씨와 같은 ‘취향 탐험가’들의 등장은 우연이 아니다. 한 레스토랑 전문 컨설턴트는 이 현상의 핵심을 ‘결핍’이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반듯한 아파트, 깔끔하게 정돈된 대형 쇼핑몰, 어딜 가나 똑같은 프랜차이즈에 둘러싸여 살아왔습니다. 이 ‘과잉의 반듯함’이 역설적으로 정서적 피로감을 안겨준 겁니다. 사람들은 인위적으로 꾸며낸 세트장이 아닌, 누군가의 삶과 노동의 흔적이 담긴 ‘날것’ 그대로의 공간에서 오히려 신선함과 진정성(Authenticity)을 느끼는 거죠.”
결국 이들의 탐험은 획일화된 현대 도시 환경 속에서 잃어버린 ‘진짜’의 감각을 되찾으려는 본능적인 몸부림에 가깝다. 특히 이 과정은 SNS 시대의 새로운 자기표현 방식과 맞물려 폭발력을 갖게 됐다. 누구나 아는 명품백 사진보다, 복잡한 골목을 헤매다 찾아낸 독특한 공간을 찍어 올리는 것이 자신의 ‘남다른 취향’을 증명하는 훨씬 더 세련된 방식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취향 자본(Taste Capital)’이다. 얼마나 비싼 것을 소비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희소하고 의미 있는 경험을 하느냐가 개인의 가치를 증명하는 시대. 김진아 씨가 인스타그램에 “#성수동카페 #공장카페 #나만알고싶은곳” 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사진을 올리는 순간, 그녀의 30분간의 ‘노동’은 수백 개의 ‘좋아요’와 부러움 섞인 댓글이라는 ‘자본’으로 전환된다. 그녀의 탐험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콘텐츠이자, 정체성이 되는 셈이다.
PART 3. 지도를 만드는 사람들
다시 김진아 씨가 찾아낸 카페. 그녀는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 인스타그램에 사진과 함께 짧은 글을 올렸다.
“철공소의 망치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커피를 마시는 경험.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한 이곳은 40년 된 자동차 부품 공장이었다고 한다. 사장님은 건물의 상처 하나하나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예측 불가능해서 더 완벽했던 오후.”
포스팅이 올라가자마자 ‘좋아요’가 찍히기 시작했다. 한 친구에게서는 “여기 어디야? 주소 좀 찍어줘!”라는 DM이 도착했다. 김진아 씨는 미소를 지으며 좌표 대신,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간판 없는 회색 철문’이라는 힌트만을 남겨주었다. 새로운 탐험가에게 다음 퀘스트를 넘겨준 것이다.
그들은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지도를 따르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 미로 속을 헤매며 자신들만의 새로운 지도를 그려나간다. 그 지도 위에는 가게 이름 대신 ‘발견의 희열’, ‘시간의 질감’, ‘나의 취향’ 같은 것들이 기록된다.
성수동과 문래동의 낡은 골목은 더 이상 도시의 낙후된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성’에 목마른 현대인들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떠나는 거대한 탐험 필드이자,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기 위한 가장 매력적인 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그리고 탐험은, 내일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