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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인간의 자리는 어디인가 - 5화
  • 진익준 작가
  • 등록 2025-10-14 08: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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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조명 아래, 길게 놓인 우드슬랩 테이블은 마치 작은 무대 같았다.


오늘 밤의 주인공은 단연 최상현 셰프의 김치찌개였다. 하지만 강혁이 설계한 이 무대에서, 주인공은 혼자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았다.


“이 김치는 작년 가을, 해남에서 직접 공수한 배추로 담근 겁니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땅속 항아리에서 숙성되며 만들어낸 이 깊은 신맛이, 오늘 사용할 돼지고기 목살의 기름진 맛을 정확하게 휘어잡을 겁니다.”


최 셰프의 목소리는 처음의 어색함이 사라지고, 30년 내공이 빚어낸 전문가의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레시피를 읊는 강사가 아니었다. 시간과 자연, 기다림의 가치를 요리라는 언어로 풀어내는 ‘장인’이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젊은 소믈리에 김민준이 복순도가의 손막걸리를 맑은 유리잔에 따르며 바통을 이어받았다.


“최 셰프님의 김치가 ‘시간의 깊이’를 담았다면, 이 막걸리는 ‘순간의 활기’를 담았습니다. 인공적인 탄산이 아닌, 쌀이 발효되며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청량감이죠. 한 모금 마셔보시면, 톡 쏘는 탄산 뒤에 따라오는 쌀의 은은한 단맛이 셰프님 찌개의 묵직함을 어떻게 경쾌하게 만들어주는지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참가자들은 숨을 죽인 채 두 전문가의 ‘공연’에 빠져들었다.


그들 중에는 국내 유수의 IT기업에서 AI 개발팀을 이끄는 윤태진 팀장도 있었다. 그는 호기심에 이 ‘미친 가격’의 행사에 참여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효율과 데이터, 알고리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효율적이군.’


윤태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최적의 맛 조합은 분자 요리학 데이터 기반으로 AI가 찾아내는 게 더 정확해. 조리는 로봇이 맡으면 편차 없이 완벽한 결과물을 낼 수 있지. 이건 그냥… 감성에 호소하는 아날로그 쇼일 뿐이야.’


그때였다. 최 셰프가 찌개를 끓이다 말고, 작은 종지를 꺼내 무언가를 툭 털어 넣었다.


“원래 제 레시피에는 없는 겁니다만… 어릴 적 비 오는 날이면, 저희 할머니께서 꼭 말린 표고버섯 가루를 한 꼬집 넣으시곤 했습니다. 감칠맛이 한결 깊어진다면서요. 오늘 비가 올 듯 날이 궂어서,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예정된 대본에 없던, 즉흥적인 행동이었다.


잠시 후, 참가자들 앞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치찌개가 놓였다.


윤태진은 무심코 국물을 한 숟갈 떠먹었다.


그리고, 모든 생각이 멈췄다.


완벽하게 계산된 맛이 아니었다. 짠맛, 신맛, 단맛, 감칠맛이 서로 어우러지면서도, 할머니의 ‘한 꼬집’이 만들어낸 미묘한 불균형이 오히려 맛의 깊이를 더했다. 그의 혀는 단순히 맛을 분석하는 것을 넘어, 비 오는 날의 풍경과 할머니의 손맛이라는 ‘이야기’를 함께 맛보고 있었다.


‘이건… 데이터로 환원할 수 없어.’


그는 깨달았다.


AI는 ‘최적의 맛’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리운 맛’을 만들지는 못한다. 로봇은 ‘완벽한 요리’를 할 수는 있지만, ‘따뜻한 요리’를 하지는 못한다. 그가 15만 원을 내고 구매한 것은 한 그릇의 찌개가 아니라, 바로 이 대체 불가능한 ‘인간적인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 시간, 강혁은 주방에 있지 않았다.


그는 지휘자처럼 홀 전체를 조망하며 무대 뒤를 지휘하고 있었다. 참가자 한 명이 벽에 걸린 낡은 조리도구에 관심을 보이자, 조용히 최 셰프에게 눈짓을 보냈다. 최 셰프는 잠시 다가가 그 조리도구에 얽힌 자신의 첫 스승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자, 이번엔 김민준 소믈리에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는 재치 있는 입담으로 막걸리에 얽힌 야사를 풀어내며 다시 분위기를 띄웠다.


박 실장은 그런 강혁의 모습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는 더 이상 요리사가 아니었다.


그는 ‘경험’을 설계하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연출가’였다.


행사가 끝나고, 만족스러운 얼굴의 참가자들이 돌아간 뒤였다.


IT 개발자 윤태진이 강혁에게 다가와 명함을 건럸다.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원장님. 저희 팀원들이 매일 컴퓨터 앞에서 야근하며 지쳐있는데… 이런 ‘이야기’가 있는 회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달 저희 팀 회식, 이곳 전체를 빌려서 진행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새로운 B2B 비즈니스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박 실장은 떨리는 손으로 정산서를 들고 왔다. 임대료와 강사료, 최고급 재료비를 모두 제하고도, 흑자였다. 6명의 손님만으로 이룬 기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자신의 스마트폰을 강혁에게 내밀었다.


‘영진 아카데미’의 SNS였다.


활짝 웃고 있는 젊은 학생이 금메달을 목에 걸고 있는 사진. 그리고 그 밑에 적힌 문구.


[“누군가 놀이에 빠져있을 때, 우리는 결과로 증명합니다. 제50회 전국요리경연대회 금메달 수상! 이것이 진짜 요리 학원의 가치입니다.”]


‘경험’과 ‘이야기’라는 강혁의 새로운 가치.


그리고 ‘수상 경력’과 ‘실적’이라는 저들의 낡았지만 강력한 가치.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한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6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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