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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 잔혹사: ‘척’하는 자는 필히 망할 것이니
  • 진익준 논설위원
  • 등록 2025-09-16 09:2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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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비자의 수준이 다릅니다. 그들은 ‘경험 수집가’입니다.
  • 공간의 역사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공장’이라는 헤리티지는 성수동의 심장입니다.
  • 경쟁의 레벨이 다릅니다. 이곳은 ‘브랜드들의 전쟁터’입니다.

[글로벌 외식정보=진익준 논설위원]



성수동 거리를 거닐다 보면, 우리는 아주 기묘한 시간 여행을 하게 됩니다. 한쪽 골목에선 수십 년 묵은 공방의 퀴퀴한 가죽 냄새와 잉크 냄새가 코를 찌르고, 바로 그 모퉁이를 돌면 과테말라 안티구아 원두를 갓 볶아낸 향긋한 커피 향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낡고 투박한 붉은 벽돌 건물 어깨 너머로, 눈부신 통유리로 지은 디올(Dior)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미래적인 위용을 뽐내는 풍경. 이것이 2025년 대한민국 서울, 성수동의 자화상입니다.


과거와 현재, 날것과 세련됨, 노동과 여가. 이질적인 단어들이 한 공간에서 충돌하며 빚어내는 ‘부조화의 조화’. 바로 이 독보적인 매력 덕분에 성수동은 명실상부 대한민국에서 가장 ‘힙’한 동네로 등극했습니다. 그러자 불나방처럼 창업가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성수동에 가게 하나 내면, 웬만하면 되지 않겠어?”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요. 하지만 여러분, 바로 그 지점에서 수많은 비극의 서막이 오릅니다.


왜일까요? 성수동은 ‘힙한 척’하는 모든 것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가차 없이 퇴출시키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까다로운 취향을 가진 소비자들의 콜로세움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의 성공 법칙은 유행이라는 파도에 잠시 올라타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이라는 단 하나의 육중한 닻을 내리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왜 성수동이 이토록 ‘진짜’에만 열광하는지, 그 이유를 세 가지 측면에서 해부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소비자의 수준이 다릅니다. 그들은 ‘경험 수집가’입니다.


과거의 소비자들이 제품의 ‘기능’을 샀다면, 요즘 소비자들은 제품에 담긴 ‘의미’를 삽니다. 특히 성수동을 찾는 이들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그들은 단순히 커피를 마시거나 물건을 사러 오지 않습니다. ‘새롭고 이색적인 경험’ 그 자체를 수집하고, 자신의 SNS에 전시함으로써 “나는 이런 취향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증명하고 싶어 하는 ‘경험 수집가’들입니다.


이들의 심미안은 매우 날카롭습니다. 마치 숙련된 미술품 감정사처럼, 어디선가 본 듯한 어설픈 흉내와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진짜 ‘오리지널리티’를 단번에 구별해냅니다. 이는 비단 국내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닙니다. ‘힙스터의 성지’로 불리는 미국 포틀랜드의 사례를 보시죠. 그곳의 수많은 로컬 브루어리나 카페가 성공한 이유는 단순히 맥주 맛이 기가 막히거나 커피가 향기로워서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100% 지역 농장에서 얻은 홉(hop)만을 사용하며, 맥주를 만드는 전 과정에서 탄소 배출을 제로(0)로 유지합니다”와 같은 그들만의 확고한 철학과 스토리를 팔기 때문입니다. 소비자는 그 맥주를 마시며 환경 보호라는 가치에 동참하는 ‘경험’을 사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고수들 앞에서, 인스타그램에서 유행하는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 공식을 그대로 베껴 노출 콘크리트에 레일 조명을 달고, 옆 동네 핫플 메뉴를 어설프게 가져온 가게가 과연 매력적으로 보일까요? 천만에요.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아, 이거? 저기서 본 거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죠.


둘째, 공간의 역사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공장’이라는 헤리티지는 성수동의 심장입니다.


성수동의 ‘힙’함은 맨땅에서 갑자기 솟아난 것이 아닙니다. 수제화, 인쇄, 금속 가공 등, 수십 년간 이 땅에 뿌리내린 제조업의 역사가 붉은 벽돌과 낡은 공장 건물 곳곳에 땀처럼 배어 있습니다. 이 동네의 성공 신화를 쓴 주역들은 모두 이 사실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성수동의 아이콘이 된 ‘대림창고’를 보십시오. 1970년대 정미소로 시작해 90년대에는 물류창고로 쓰이던 낡은 건물의 골조와 벽을 허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거친 질감과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살려 갤러리와 카페로 만들었죠. 이는 과거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자, 공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설치미술이 되는 마법을 부렸습니다. 카페 ‘어니언’ 역시 낡은 금속 부품 공장을 개조하면서, 녹슨 철문과 허름한 시멘트 바닥을 그대로 보존했습니다. 사람들은 커피만 마시는 게 아니라, 1970년대의 장인들과 2020년대의 바리스타가 한 공간에서 대화하는 듯한 특별한 시간 여행을 경험합니다.


이는 도시 재생의 세계적인 모범 사례로 꼽히는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미술관과 정확히 같은 맥락입니다. 과거 화력발전소였던 건물의 상징인 거대한 굴뚝과 터빈 홀을 보존하여, 세계적인 현대미술 갤러리로 재탄생시켰습니다. 만약 이들이 낡은 공장과 발전소를 완전히 밀어버리고 번쩍이는 새 건물을 지었다면, 지금과 같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아마 불가능했을 겁니다. 성수동의 ‘결’을 무시하고, 맥락 없이 세련되기만 한 가게는 뿌리 없는 나무처럼 공허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셋째, 경쟁의 레벨이 다릅니다. 이곳은 ‘브랜드들의 전쟁터’입니다.


성수동은 더 이상 한가로운 동네 장사를 하는 곳이 아닙니다. 디올, 샤넬, 루이비통 같은 글로벌 명품 브랜드가 앞다투어 팝업 스토어를 열고, 탬버린즈, 아더에러, 무신사 같은 국내에서 가장 트렌디한 브랜드들이 자존심을 건 플래그십 스토어를 운영합니다. 이곳은 당대 최고의 브랜드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고, 가장 혁신적인 실험을 펼치는 ‘브랜드의 월드컵’ 무대입니다.


이런 프로들의 전쟁터에, “요즘 이게 유행이라던데?” 하는 식의 어설픈 컨셉과 기획력으로 뛰어드는 것은, 동네 조기축구회 선수가 아무런 훈련 없이 월드컵 결승전에 나서는 것과 같습니다. 결과는 참혹할 수밖에요. 소비자들은 이미 최고의 브랜드들이 제공하는 최상의 경험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들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면, 존재감 없이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척’하는 가게와 ‘진짜’ 가게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를까요?


‘척’하는 가게는 “성수동이 요즘 뜬다니까”라는 동기에서 출발합니다. 과정은 단순합니다. 인스타그램을 교과서 삼아 유행하는 인테리어를 흉내 내고, 메뉴는 다른 핫플에서 검증된 것들을 짜깁기합니다. 그 가게만의 철학이나 이야기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어디서 본 듯한 ‘양산형 감성 가게’가 되어, 손님들의 기억에 한 톨의 인상도 남기지 못하고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반면 ‘진짜’ 가게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마침 성수동이라는 공간의 역사성과 잘 어울린다”는 명확한 자기 확신에서 출발합니다. 확고한 브랜드 철학이 먼저 있고, 공간은 그 철학을 구현하는 무대가 되며, 메뉴와 상품은 그 철학을 맛보고 경험하게 하는 매개체가 됩니다. 탬버린즈가 화장품 매장을 하나의 ‘미술 전시’처럼 구성한 것이나, 블루보틀이 창고형 공간에서 ‘커피에만 집중하는 장인정신’을 보여준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적인 경험을 제공하며, 가게 자체가 하나의 ‘목적지’가 됩니다.


결론적으로 성수동은 매우 역설적인 공간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트렌디하지만, 정작 트렌드를 맹목적으로 좇는 이들은 철저히 외면합니다. 그러니 성수동에 가게를 열고 싶다면,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뜰까?”가 아니라, “나는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나만의 진짜 이야기가 있는가?” 입니다.


성수동에 가서 쿨해지려 애쓰지 마십시오. 당신이 이미 충분히 쿨하고, 당신만의 진솔한 이야기가 있다면, 성수동이 먼저 당신을 알아보고 기꺼이 그 품을 내어줄 것입니다. 당신의 브랜드 스토리가 탄탄하다면, 당신이 어디에 있든 그곳이 바로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또 다른 ‘성수동’이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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