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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르포] 공간의 연금술사들
  • 진익준 논설위원
  • 등록 2025-09-20 09:37:18
  • 수정 2025-09-25 15: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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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년 된 인쇄소에서 ‘대체 불가능한 경험’을 만드는 법
이곳은 단순한 카페가 아니다. 1980년대 시집(詩集)을 주로 찍어내던 ‘광명인쇄’의 흔적 위에 세워진 하나의 완결된 경험의 공간이다. 이곳의 주인 이유진(가명, 35세) 씨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자신은 카페 사장이 아니라, 이 공간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문장 수집가’라고.

[글로벌 외식정보=진익준 논설위원]




프롤로그: 먼지에서 황금을 빚는 사람들


서울 을지로의 한 골목, 문을 연 지 1년 된 카페 ‘첫 문장’은 오늘도 만석이다. 은은한 커피 향 사이로 묘하게 섞여드는 낡은 종이와 잉크 냄새. 손님들은 커피를 마시며, 벽에 걸린 낡은 활자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오래된 인쇄기 부품으로 만든 조명 아래서 책을 읽는다.


이곳은 단순한 카페가 아니다. 1980년대 시집(詩集)을 주로 찍어내던 ‘광명인쇄’의 흔적 위에 세워진 하나의 완결된 경험의 공간이다. 이곳의 주인 이유진(가명, 35세) 씨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자신은 카페 사장이 아니라, 이 공간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문장 수집가’라고.


성수동, 문래동, 을지로. 폐허처럼 버려진 공간을 보석으로 바꾸는 ‘공간의 연금술사들’. 그들은 어떻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먼지 속에서 황금을 발견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법을 부리는 것일까? 그들의 연금술, 그 첫 번째 단계를 따라가 본다.



PART 1. 1단계 연금술: 임차인이 아닌, 역사학자가 되어라


디자이너였던 이유진 씨가 처음부터 이런 공간을 찾았던 것은 아니다. 그녀 역시 다른 예비 창업가들처럼 깨끗한 신축 상가, 유동인구가 보장된 대로변을 먼저 알아봤다. 하지만 권리금만 수억 원에 달하는 그곳들에선 어떤 영감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텅 빈 엑셀 시트 같았어요. 숫자는 완벽했지만, 어떤 이야기도 없었죠.”


운명처럼 ‘광명인쇄’ 자리를 발견한 것은 끝없는 발품의 결과였다. 10년 넘게 방치돼 먼지가 켜켜이 쌓인 공간. 모두가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는 바닥에 희미하게 남은 잉크 자국과 벽 한구석에 붙어있는 낡은 달력에서 ‘이야기’의 원석을 발견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후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인테리어 업체를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역사학자’가 되기로 했다.


  1. 기록 보관소로 향하다: 구청 건축과를 찾아 40년 전의 건축물대장과 설계 도면을 열람했다. 공간의 뼈대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2. 이웃을 탐문하다: 주변의 오래된 가게 사장님들을 찾아다니며 ‘광명인쇄’ 시절의 이야기를 수집했다. 시집을 주로 찍던 고집 센 사장님의 이야기, 밤새 기계를 돌리던 시절의 소음과 열기에 대한 증언들을 빼곡히 기록했다.


  3. 공간의 상처를 기록하다: 무심코 지나칠 법한 바닥의 흠집, 벽의 못 자국, 기계가 놓여 있던 자리의 움푹 팬 흔적들을 모두 사진으로 찍고 그 위치를 도면에 표시했다. 그녀에게 이것은 없애야 할 하자가 아니라, 보존해야 할 역사의 증거였다.


한 창업 컨설턴트는 이 단계를 “모든 연금술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팔아야 할 것은 커피나 음식이 아니라 그 공간의 ‘영혼’입니다. 그 영혼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떤 컨셉도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PART 2. 2단계 연금술: 지배가 아닌, 존중으로 디자인하라


이 씨의 인테리어 컨셉은 단 한 문장이었다. “시간이 디자인하게 하라.” 그녀는 공간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공간이 가진 고유한 특징을 주인공으로 세웠다.


  • 보존: 잉크가 스며들어 거뭇해진 콘크리트 바닥은 갈아내는 대신, 투명 에폭시로 얇게 코팅하여 ‘역사의 얼룩’을 그대로 전시했다.


  • 재해석: 버려지려던 낡은 활자 보관함(type drawers)은 수거하여 벽에 걸어 원두나 굿즈를 전시하는 가장 독특한 진열장으로 만들었다.


  • 대비: 새로 만든 커피 바와 테이블은 의도적으로 가장 현대적이고 미니멀한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했다. 낡음과 새로움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오히려 공간이 가진 시간의 깊이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장치였다.

이는 ‘인위적인 인더스트리얼 풍’ 인테리어와 ‘진짜 인더스트리얼 헤리티지’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다. 그녀는 트렌드를 따라 한 것이 아니라, 공간의 역사를 존중하는 자신만의 디자인 언어를 창조했다.



PART 3. 마지막 연금술: 대체 불가능한 경험의 완성


공간이라는 하드웨어가 완성되자, 이 씨는 그곳에 담길 소프트웨어를 채워나갔다. 그녀의 목표는 ‘커피 파는 곳’이 아닌, ‘대체 불가능한 경험을 파는 곳’이었다.


  1. 철학이 담긴 메뉴 (Product): 대표 블렌드의 이름은 ‘첫 문장(First Print)’. 디저트로는 책 더미 모양의 파운드케이크를 개발했다. 메뉴 하나에도 인쇄소의 스토리를 담아냈다.


  2. 이야기를 파는 접객 (Service): 직원들은 손님들에게 이곳이 과거 시집을 만들던 인쇄소였음을 설명한다. 이는 단순한 응대를 넘어, 손님을 공간의 역사 속으로 초대하는 행위다.


  3. 문화를 만드는 가게 (Story): 한 달에 한 번, 무명 시인들을 초대해 ‘인쇄소 시 낭독회’를 연다. 가게는 단순히 커피를 파는 상점을 넘어, 지역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커뮤니티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 네 가지 요소(Space, Product, Service, Story)가 완벽하게 맞물릴 때, ‘첫 문장’은 비로소 ‘대체 불가능한 공간’으로 완성된다.



에필로그: 연금술사의 코드를 기억하라


이유진 씨의 성공은 특별한 재능이나 거대한 자본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진정성’이라는 원칙을 지키며, 정해진 공식을 차근차근 밟아나간 당연한 결과에 가깝다.


성공적인 공간의 연금술사가 되기 위한 코드는 명확하다.


  • 연금술의 3단계: 역사학자가 되고, 존중으로 디자인하며, 문화에 기여하라.


  • 피해야 할 4가지 독(毒): 오직 사진만 생각하는 ‘인스타그래머블 병’, 줏대 없는 ‘트렌드 추종’, 이웃과의 ‘단절’, 인위적인 ‘마케팅 의존’을 경계하라.


당신의 목표는 ‘이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숍’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전 세계에서 오직 하나뿐인, 이 건물의 역사를 품은 유일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평범한 돌멩이를 황금으로 바꾸는, 이 시대 가장 강력한 연금술이다.


ikjunj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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