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외식정보=진익준 논설위원]

혹시 오래된 요리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오르시나요?
정신없이 돌아가는 주방, 쉴 새 없이 울리는 주문서 프린터,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불호령을 내리는 주방장.
“막내! 양파 다 썰었어?”
“정신 안 차려?”
꾸지람을 들으며 눈물 콧물 쏙 빼며 양파를 까던 견습생.
칼끝으로 기술을 배우고, 고된 육체노동 속에서
언젠가 ‘프라이팬을 잡는 날’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025년 오늘, 당신의 주방에는
역사상 가장 완벽한 부사수가 등장했습니다.
이 부사수는 24시간 일해도 지치지 않고,
단 한 번의 불평도 없습니다.
0.1mm의 오차도 없이 양파를 썰고,
수백 가지 소스 레시피를 정확히 기억합니다.
심지어 과거 데이터를 분석해
오늘의 재료 소진량까지 예측하죠.
이름은 인공지능(AI), 그리고 자동화 로봇입니다.
여기서 묘한 질문이 생깁니다.
막내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면,
그를 가르치고 이끌던 ‘사수’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AI가 주방의 막내가 되었다면,
인간 리더는 이제 어디에 서야 할까요?
혹시 우리는 영화 <터미네이터>의 인간 저항군처럼,
언젠가 자리를 빼앗길 운명에 놓인 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I는 인간의 자리를 빼앗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진짜 리더의 자리로 밀어올리는 존재입니다.
단지 역할의 무게 중심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과거의 리더가 기술자와 관리자였다면,
이제는 비전가이자 코치로 거듭나야 합니다.
AI가 ‘손발’과 ‘단기 기억’을 담당하는 동안,
인간 리더는 이제 ‘영혼’과 ‘장기 기억’을 불어넣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배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AI는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지만,
그 목표의 ‘이유’를 묻지는 않습니다.
“우리 레스토랑은 앞으로 어떤 가치를 전할 것인가?”
이 질문은 오직 인간 리더만이 할 수 있습니다.
셰프 댄 바버는 ‘지속가능한 농업’이라는 철학으로
레스토랑 블루 힐을 운영합니다.
그는 음식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음식의 미래를 제시하는 사람입니다.
한국의 젊은 셰프들이 잊힌 고조리서를 탐구하고
새로운 한식의 길을 찾는 이유도 같습니다.
그들은 요리사가 아니라,
한식의 방향을 제시하는 비전가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리더십은 어떻습니까?
로봇이 파스타를 정확히 만들도록 감독하는 데 머물러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이 동네에서 가장 따뜻한 위로를 요리한다”
라는 영혼을 팀에 불어넣고 있습니까?
AI가 할 수 있는 일은 AI에게 맡기십시오.
리더는 방향을 제시하는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배가 어디로 향하는지,
그 별자리를 읽을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인간만이 인간을 성장시킨다
과거의 사수는 부사수에게
칼질, 불 조절, 소스 비율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기술을
AI가 더 정확히 수행합니다.
그렇다면 인간 리더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이제 리더는 ‘기술’이 아니라 ‘감정’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레스토랑 경영자 대니 마이어는
‘따뜻한 환대(Enlightened Hospitality)’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직원에게 와인 따르는 법보다,
손님의 마음을 읽는 법을 먼저 가르칩니다.
손님의 표정에서 하루의 피로를 읽고,
기념일 테이블에 조용히 디저트를 내는 센스.
그건 알고리즘으로는 배울 수 없는 인간의 감각입니다.
AI는 계산하지만,
리더는 감응합니다.
미래의 리더는 직원의 감정 노동을 보듬고,
그들이 고객에게 인간적인 경험을 선사하도록 돕는 코치가 되어야 합니다.
주방에서는 AI와 협업하며
새로운 메뉴를 창조하도록 영감을 불어넣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어야 합니다.
로봇에게 지시하는 관리자로 남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인간에게 영감을 주는 코치로 거듭나시겠습니까?
과거의 주방이 전쟁터 같았다면,
미래의 주방은 오케스트라가 될 것입니다.
AI와 로봇은 정확히 리듬을 맞추는 기계 연주자,
사람은 감정과 표현을 담당하는 인간 연주자.
리더는 이 모든 소리를 들으며
조화로운 하모니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지휘자는 모든 악기의 숨소리를 듣습니다.
주방에서는 로봇의 데이터 신호를,
홀에서는 직원의 작은 한숨을.
그리고 그 사이에서
‘고객의 완벽한 경험’이라는 교향곡을 완성하죠.
AI 시대의 리더는 더 이상
가장 뛰어난 기술자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가장 깊은 철학자,
가장 섬세한 심리학자,
가장 조화로운 예술가가 되어야 합니다.
AI는 당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경쟁자가 아닙니다.
당신을 반복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리더 본연의 영역 —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자리로 초대합니다.
이제 질문은 간단합니다.
새로운 부사수는 이미 주방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이제 당신이 진짜 ‘사수’,
시대를 이끄는 ‘마스터’로 설 준비가 되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