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예약 전화 이후, 기적처럼 4명의 추가 예약이 들어왔다. 총 6명. 12명 정원의 절반이었다.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지만, 학원의 분위기는 여전히 살얼음판이었다. 강혁은 자신을 옭아매던, 보이지 않는 세 개의 사슬이 학원 전체를 짓누르고 있음을 느꼈다.
첫 번째 사슬, ‘관성의 중력’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못하겠습니다, 원장님.”
학원의 터줏대감이자 한식 파트를 총괄하던 최상현 셰프였다. 그는 30년간 국자로만 자신의 길을 걸어온 장인이었다.
“제게 김치찌개를 가르치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할 수 있습니다. 허나, 사람들 앞에서 술 따르고 이야기하며 광대놀음을 하라니요. 저는 기술자이지, 만담꾼이 아닙니다.”
과거의 강혁이었다면 “시대가 변했으니 따르시죠!”라며 권위로 윽박질렀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엔 저 고집 센 장인을 잃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강혁은 달랐다. 그는 최 셰프의 저항이 단순한 똥고집이 아닌, 자신의 삶과 직업에 대한 ‘자존심’임을 이해했다.
“최 셰프님, 혹시 최고의 뮤지컬 배우가 노래만 잘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요. 최고의 배우는 무대 장치와 조명, 다른 배우와의 호흡까지 모두 이해하고 활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셰프님의 30년 내공이 담긴 김치찌개는 이번 미식회의 주인공, 즉 ‘주연 배우’입니다. 저는 그 주연을 돋보이게 해줄 ‘조명 감독’을 한 분 모셨을 뿐입니다.”
강혁이 문을 열자, 훤칠한 키에 뿔테 안경을 쓴 젊은 남자가 들어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최상현 셰프님. 우리술 소믈리에 김민준입니다.”
최 셰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혁은 두 사람을 마주 보게 했다.
“최 셰프님께서는 최고의 ‘맛’을 책임져 주십시오. 김민준 소믈리에가 그 맛에 어울리는 최고의 ‘향과 이야기’를 더해줄 겁니다. 두 분이 이 무대의 공동 연출가이십니다.”
‘대체’가 아닌 ‘연결’.
강혁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을 싸움 붙이지 않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파트너로 만들었다. 최 셰프의 얼굴에서 굳은 저항감이 누그러지는 것을, 강혁은 놓치지 않았다.
두 번째 사슬, ‘기울어진 운동장’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원장님! 큰일 났어요!”
박 실장이 핸드폰을 들고 뛰어 들어왔다. 화면에는 ‘영진 아카데미’의 페이스북 광고가 떠 있었다.
[“하룻밤 파티에 15만 원? 바보들의 돈 잔치! 영진에서는 단돈 25만 원에 국가공인 자격증을!”]
노골적인 저격이었다. 심지어 광고 영상에는 강혁의 학원 전경까지 흐릿하게 비쳤다.
“이거… 명백한 영업 방해 아닌가요? 정말 너무하네요!” 박 실장이 분을 삭이지 못했다.
강혁은 광고를 잠시 들여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실장님, 저들은 지금 태평양에 거대한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겁니다.”
“네?”
“우리는 작살 하나 들고 우리 동네 앞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거고요. 누가 더 현명한 겁니까?”
강혁은 지도를 펼쳤다. 그가 사는 경기도 군포시의 지도였다.
“영진 아카데미의 광고는 불특정 다수를 향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미식회는 달라요. 저는 어제 군포 전통시장의 ‘형제 정육’ 사장님과 계약했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 우리 미식회만을 위한 최고의 돼지고기를 따로 빼주시기로요. 그리고 김민준 소믈리에가 추천한 막걸리는 군포 바로 옆 의왕시에 있는 ‘오봉산 양조장’의 것입니다.”
그는 박 실장을 보며 말했다.
“우리의 무기는 ‘하이퍼-로컬’입니다. 영진 아카데미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바로 오늘, 우리 동네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함. 저들의 탱크에 맞서 소총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저들의 탱크가 들어올 수 없는 좁은 골목길에서 우리만의 전투를 벌이는 겁니다.”
박 실장은 깨달았다. 강혁이 단순히 ‘이상’을 좇는 게 아니라, 누구보다 냉철하게 자신만의 전장(戰場)을 설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사슬,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금요일 저녁 7시. 미식회 시작 30분 전.
강의실은 이제껏 본 적 없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차가운 스테인리스 조리대는 따뜻한 우드슬랩 테이블로 덮였고, 형광등 대신 은은한 조명이 공간을 채웠다. 정갈하게 세팅된 테이블 위에는 오늘 맛볼 막걸리와 재료들이 예술품처럼 놓여 있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하지만 예약 인원은 여전히 6명에 머물러 있었다.
12개의 의자 중 절반이 비어있었다.
그 순간, 10년 후 폐업한 학원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던 미래의 기억이 섬광처럼 스쳤다.
‘만약…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15만 원이라는 가격이 결국 미친 짓이었다고 조롱당하면 어떡하지?’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원장님.”
박 실장이 따뜻한 차를 건넸다.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의심이 아닌, 불안한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멋지네요. 학원이… 살아있는 것 같아요.”
그때였다.
딸랑-
학원 문에 달린 작은 종이 울렸다.
첫 번째 예약 손님이었다. 그리고 연이어 다음 손님이, 또 다른 손님이 들어왔다.
약속된 6명이 모두 도착했다.
강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괜찮아. 설령 오늘 적자를 보더라도, 이 6명에게서 얻는 데이터와 경험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어. 이건 도박이 아니라 실험이야.’
‘실패해도 좋은 실험’.
그것이 과거의 자신을 옭아맸던 마지막 심리적 사슬을 끊어내는 주문이었다.
잠시 후, 강혁의 소개와 함께 미식회의 막이 올랐다.
잔뜩 긴장했던 최 셰프는 어느새 자신의 김치찌개에 담긴 30년 내공을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있었고, 김민준 소믈리에는 막걸리를 따르며 구수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참가자들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단순한 요리 수업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경험’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강혁의 위대한 실험은, 이제 막 첫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5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