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외식정보=진익준 작가]

2025년 10월, 가을 하늘은 높고 공활했지만 판교 테크노밸리 12층, 내 자리의 공기는 언제나처럼 희박했다. 모니터 속 엑셀 시트의 2만 번째 행을 지날 때쯤이면 어김없이 가벼운 두통과 함께 영혼이 이탈하는 감각이 찾아왔다.
내 이름은 김민준, 34세. 대한민국에서 IT 좀 한다는 대기업의 데이터 분석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부장님의 예측이 왜 기가 막히게 훌륭했는지를 증명할 데이터를 밤새 찾아내는 ‘데이터 연금술사’였다. 어젯밤에도 나는 법인카드로 시킨 차가운 피자를 씹으며, ROI(투자수익률) 마이너스 200%짜리 신사업의 성공 가능성을 역산출해내는 기적을 행했다.
"김 대리, 어제 보낸 보고서 말이야. 그래프 색깔이 좀 칙칙하지 않아? 우리 회사의 비전과 열정을 담아서, 좀 더 강렬한 레드로…"
팀장의 피드백을 들으며 생각했다. 내 서른네 해 인생의 비전과 열정은 지금 무슨 색이더라. 아마, 모니터 블루라이트처럼 시퍼렇게 죽어있거나, 엑셀 시트의 회색 칸처럼 무미건조할 터였다.
퇴사를 결심한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지하철 광고판에 붙은 한 문장이 내 발을 붙들었다.
[사장님의 시간은 소중하니까요. 완벽한 시스템이 알아서 돈을 법니다. 소자본 1인 창업, 무인 밀키트 전문점 '밀리언즈 키친'.]
‘시스템이 알아서 돈을 번다.’
그것은 내 종교와도 같은 말이었다. 세상은 데이터와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다. 감(感)이나 열정 같은 불확실한 변수가 끼어드는 순간, 모든 것은 엉망이 된다. 내 지난 10년의 회사 생활처럼.
며칠 뒤, 나는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강남의 한 빌딩에서 열린 창업 설명회에 앉아 있었다.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는 최 팀장은 나와 같은 종족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었다.
“저희 ‘밀리언즈 키친’은 감성팔이 장사가 아닙니다. 철저한 데이터 기반의 과학입니다. 전국 200개 가맹점의 판매 데이터(POS)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각 상권별 최적의 상품 구성(SKU)을 주 2회 제안해 드립니다. 점주님은 그저 발주 버튼만 누르시면 됩니다. 목표는 단 하나, 1년 내 손익분기점(BEP) 돌파. 이것이 저희의 핵심성과지표(KPI)입니다.”
심장이 뛰었다. 저거다. 저것이야말로 내가 꿈꾸던 완벽한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주방장이 될 필요도, 손님에게 아양을 떨 필요도 없다. 나는 그저 시스템을 감독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관리자’가 되면 되는 것이다.
상담 끝에 추천받은 점포는 경기도의 한 대단지 아파트 상가 1층이었다. 1,500세대 배후 수요, 주거 만족도 최상위권. 모든 데이터가 완벽했다.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옆 가게였다.
‘서연이네 반찬’.
코팅이 벗겨져 너덜너덜한 간판, 김 서린 유리창 너머로 들여다보이는 비좁은 가게. 그 안에는 밀가루 묻은 앞치마를 두른 중년의 여사장님이 연신 무언가를 무치고 볶고 있었다. 쿰쿰한 멸치 볶는 냄새와 고소한 들기름 향이 뒤섞여 흘러나왔다.
나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비효율의 극치로군.’
메뉴는 매일 바뀌는 것 같았고, 가격표는 손글씨로 대충 적혀 있었다. 저 가게의 KPI는 무엇일까? 재고 관리는 어떻게 할 것이며, 원가 계산은 제대로 할까? 아마 모든 것이 사장님의 ‘감’이라는 주먹구구식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을 터였다. 저런 가게는 곧 도태될 것이다. 내 똑똑하고 세련된 무인 매장이 바로 옆에 들어서면 더더욱.
“사장님, 옆 가게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타겟 고객층이 전혀 달라요. 저희는 ‘특별한 한 끼’를 원하는 3040 맞벌이 부부를, 저기는… 뭐, 매일 반찬 걱정하는 분들을 상대하는 곳이니까요.”
최 팀장의 말은 내 분석과 정확히 일치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 나는 본사 사무실에서 가맹 계약서 위에 내 이름을 썼다. 펜 끝으로 종이를 누르는 감각이 선명했다. 지난 10년간 나를 옭아매던 보고서와 엑셀 시트의 사슬을 끊어내는 의식처럼 느껴졌다. 퇴직금과 신용대출로 끌어모은 1억 2천만 원이 담긴 통장은 가벼워졌지만, 마음은 날아갈 듯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오던 길, 나는 내 가게가 될 점포 앞에 다시 섰다. 머릿속에는 이미 완벽한 엑셀 시트가 그려지고 있었다. 예상 매출, 변동비, 고정비, 그리고 월 500만 원이라는 선명한 목표 순수익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옆 가게 박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양념 묻은 고무장갑을 낀 채,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를 우월감에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그녀는 몰랐을 것이다. 내가 단순한 구멍가게 주인이 아니라, 데이터를 무기로 미래를 예측하는 경영자라는 사실을. 그리고 나 역시 몰랐다. 내가 보고 있는 엑셀 시트는 미래를 예측하는 예언서가 아니라, 곧 산산조각 날 한 청년의 희망 회로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렇게 나의 꿈은,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하고 완벽하게 시작되었다.
적어도, 인테리어 공사가 끝나고 첫 물건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2화에서 계속....
레스토랑의 경영과 마케팅을 연구하고 희망을 스토리텔링합니다.
골목길 컨설턴트: ikjunji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