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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엑셀은 배신하지 않는다?
  • 진익준 작가
  • 등록 2025-10-16 22:50:45
  • 수정 2025-10-18 07:4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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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직 데이터 분석가의 폐업 직전 창업 분투기


첫 한 달은, 내 예측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내 가게 ‘밀리언즈 키친’은 반짝이는 스테인리스와 환한 LED 조명으로 무장한 채, 낡은 상가 건물에서 홀로 미래적인 빛을 뿜어냈다. 젊은 부부들이 유모차를 끌고 와 키오스크 화면을 터치했고, 퇴근길의 직장인들은 ‘오늘 저녁은 이걸로 해결’이라는 표정으로 간편하게 카드를 찍었다. POS 단말기에 찍히는 매출 그래프는 우상향 곡선을 그렸다. 마치 내가 입사 초기에 만들었던 가장 이상적인 비즈니스 모델의 시뮬레이션 결과처럼.


나는 매일 밤, 마감 후 텅 빈 가게에 앉아 스마트폰 앱으로 그날의 매출을 확인하는 의식을 즐겼다. 화면 속에서 초록색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보는 것은, 부장님의 공허한 칭찬보다 훨씬 짜릿한 쾌감을 주었다.


‘월 매출 1,500만 원. 목표 달성률 85%. 순항 중.’

나는 이 데이터를 내 인생의 새로운 KPI로 삼았다. 이 숫자야말로 지난 10년간의 헛된 노동을 보상해 줄 유일한 증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월말이 다가올수록 선명해졌다. 내 사업의 주가(株價) 지수나 다름없는 POS 매출액은 분명 순항 중인데, 정작 내 돈이 오가는 은행 계좌의 잔고는 가라앉는 배처럼 매일 수위가 낮아지고 있었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기분이었다.


엑셀은 배신하지 않는다.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 스프레드시트에는 없는 유령 변수가 이 가게 어딘가에 숨어, 시스템의 피를 빨아먹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데이터 탐정’이 되어 그 보이지 않는 범인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첫 번째 용의자는 가게 뒤편의 검은색 쓰레기통이었다.


문을 열자, 시큼하고도 달콤한 부패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범인은 그곳에 있었다. 유통기한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은 채소들이었다. 월요일에 야심 차게 들여놓은 샐러드용 루꼴라는 수요일의 비와 함께 처참히 시들었고, 주말 캠핑족을 노렸던 아스파라거스는 팔리지 않은 채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본사 데이터는 ‘지난주 전국 판매량 3위’라며 이 녀석들을 추천했지만, 우리 동네 사람들의 저녁 식탁에 아스파라거스를 올릴 계획 따윈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 처참한 주검들을 ‘폐기 손실’이라는 항목으로 엑셀 시트에 추가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잔인한 숫자였다.


두 번째 용의자는 24시간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냉장고와 냉동고였다.


그들은 성실했지만, 탐욕스러웠다. 월말에 날아온 전기요금 고지서는 내가 회사 다닐 때 내던 한 달 치 월세와 맞먹었다. ‘무인 매장의 편리함’이라는 가치는 엄청난 양의 전기를 먹고사는 괴물이었다. 이 역시 ‘고정비’ 항목에서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는 복병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가장 강력한 용의자는 내 이메일 함에 있었다.


[점주님께, 본사 신메뉴 ‘프리미엄 트러플 한우 스테이크 키트’ 출시 안내…]

최 팀장에게서 온 메일이었다. ‘소비자 반응 최고, 예상 판매량 급증!’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각 가맹점별 ‘초도 발주 의무 수량’이 명시되어 있었다. 개당 4만 5천 원짜리 스테이크 키트를 20개. 90만 원어치였다. 우리 동네에서 4만 5천 원이면 네 식구가 뜨끈한 감자탕을 먹고도 남는 돈이다. 이건 ‘제안’이 아니라 사실상의 ‘강매’였다. 나는 깨달았다. 나와 본사의 관계는 파트너십이 아니라, 내가 꼬박꼬박 공물을 바쳐야 하는 봉건시대의 영주와 소작농의 관계에 더 가깝다는 것을.


그날 저녁,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나는 처참한 심정으로 유리창 밖을 내다봤다.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긴 거리. 그때 옆 가게 ‘서연이네 반찬’의 문이 열리더니, 박 사장님이 밖으로 커다란 철판을 들고 나왔다. 그 위에는 노릇노릇하게 부쳐진 김치전과 해물파전이 먹음직스러운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비 오는 날 즉석 부침개’. 그녀는 데이터가 아니라 하늘을 보고, 메뉴를 바꾼 것이다. 잠시 후, 우산을 쓴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씩 전 냄새에 이끌려 가게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내 가게의 냉장고를 돌아봤다. 비 오는 날의 축축함과는 아무 상관없는 샐러드 키트와 스테이크 키트들이 형광등 불빛 아래 차갑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들은 날씨의 변화도, 사람의 마음도 읽지 못했다. 그저 본사의 데이터가 시키는 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첫 달의 결산일. 나는 심호흡을 하고 노트북을 열었다. 총매출 1,480만 원. 나쁘지 않은 숫자였다. 하지만 이내 나는 숫자의 마법이 어떻게 현실을 왜곡하는지를 처절하게 깨달았다.


매출 1,480만 원에서, 본사에서 떼어가는 물품 원가 700만 원을 뺐다. 남은 돈은 780만 원. 여기서 월세 250만 원, 전기요금 80만 원, 각종 수수료와 세금 150만 원, 그리고 쓰레기통에 처박은 폐기 손실 120만 원을 제했다.


화면에 최종적으로 찍힌 숫자는 ‘1,800,000원’이었다.


한 달 내내 새벽같이 나와 매장을 쓸고 닦고, 밤늦게까지 재고를 정리한 내 노동의 대가가 고작 180만 원. 이것은 이익이 아니었다. 내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인건비였다. 내 가게는 돈을 번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 시간과 노동력을 헐값에 착취하며 겨우 현상 유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텅 빈 가게에 홀로 앉아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의 완벽한 시스템은, 나의 빛나는 엑셀 시트는, 결국 나에게 180만 원짜리 실패를 안겨주었다.


고개를 돌리자, 옆 가게의 불이 꺼졌다. 앞치마를 푼 박서연 사장님이 피곤한 기색으로 가게 문을 잠그고 있었다. 그녀의 가게는 과연 얼마를 벌었을까. 그녀의 장부에는 과연 어떤 숫자들이 적혀 있을까.


그 순간, 내가 한없이 비웃었던 그 낡고 촌스러운 가게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공식으로 가득 찬, 거대한 성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3화에서 계속........



레스토랑의 애환을 연구하고 희망을 스토리텔링합니다.
골목길 컨설턴트: ikjunj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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