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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슬세권의 장인, 혹은 잔소리꾼
  • 진익준 작가
  • 등록 2025-10-17 07:08:51
  • 수정 2025-10-19 08: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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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직 데이터 분석가의 폐업 직전 창업 분투기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데이터를 신봉하는 나 같은 인간에게는 일종의 신성모독과도 같았다. 180만 원이라는 처참한 결과 앞에서, 나는 이틀 밤낮으로 새로운 엑셀 시트를 구축했다. 변수를 추가하고, 가중치를 조정하며, 수백 번의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결론은 하나였다. ‘매출 총이익률(Gross Profit Margin)’을 높여야 한다. 즉, 더 비싸게 팔거나, 더 싸게 가져오거나.


후자는 본사와의 계약상 불가능했으므로, 나는 전자에 집중하기로 했다. 데이터 분석 결과, 우리 동네의 1인당 평균소득(GNI)은 수도권 평균을 상회했다. 구매력이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들의 지갑을 열 ‘매력적인 제안’이 부족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나는 야심 찬 프로모션을 기획했다.


[프리미엄 샐러드 키트 1+1 이벤트! 판교의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당신의 식탁으로!]


논리는 완벽했다. 가장 마진율이 높은 상품을, 가장 구매력 있는 고객층에게, 가장 매력적인 조건으로 제안한다. 실패할 리 없는 완벽한 알고리즘이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3일 동안 샐러드 키트는 단 4개가 팔려나갔다. 그중 2개는 무료 증정품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판교의 라이프스타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퇴근 후, 뜨끈한 김치찌개에 소주 한 잔을 더 간절히 원했다. 내 프로모션은, 마치 남극에서 팥빙수를 팔려 한 어리석은 장사꾼의 객기와도 같았다.


마지막 샐러드 키트를 쓰레기통에 처넣던 그 순간, 내 안에 있던 마지막 자존심의 댐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홀린 듯 옆 가게, ‘서연이네 반찬’으로 향했다. 데이터를 넘어선 그곳의 ‘변수’를, 나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딸랑, 낡은 풍경 소리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후끈한 열기와 짭조름한 간장 냄새, 고소한 참기름 향이 온몸을 감쌌다. 박서연 사장님은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에 시금치를 넣고 조물조물 무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흘깃 쳐다볼 뿐, 아무 말도,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저… 사장님. 장사 잘 되시네요."

어색한 침묵을 깬 내 첫마디는 지독하게 바보 같았다. 그녀는 시금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꾸했다.

"그냥, 먹고 살 만큼은."


나는 용기를 내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최대한 전문가처럼 보이도록, 회사에서 쓰던 용어를 섞어가며 질문을 던졌다.


"제가 궁금한 건… 사장님의 핵심 원가 관리 전략입니다. 매일 이렇게 메뉴가 바뀌면 재고 리스크가 클 텐데, 로스율(Loss Rate)은 어떻게 관리하시는지…"


그 순간, 그녀가 시금치를 무치던 손을 멈췄다.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턱을 한번 쓱 치켜올리며,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봤다. 그 눈빛은 마치 철없는 아들의 성적표를 받아 든 엄마의 그것과도 같았다.


"로스? 저기 저 무말랭이 보여요? 어제 팔다 남은 무 대가리로 만든 거야. 저기 저 멸치볶음은? 꽈리고추가 시들시들해지길래 냅다 같이 볶아버렸지. 그게 내 로스 관리야. 됐수?"


"아… 네…"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세계에서 ‘재고 관리’란 엑셀 시트가 아닌, 끓고 있는 냄비 안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의 영역이었다.


나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약간의 동정심을 유발해 핵심 정보를 얻어내려는, 비겁하지만 절박한 시도였다.


"사실… 제가 지난달에 정산을 해보니, 월세 내고 뭐 떼고 나니까 180만 원밖에 안 남았더라고요. 뭐가 잘못된 건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때였다. 박 사장님은 무심하게 시금치 한 가닥을 입에 쏙 넣고 맛을 보더니,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 목소리는 나른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문장은 내 뒤통수를 후려치는 죽비 소리처럼 날카로웠다.


"180만 원? 그거 이익 아니야. 사장 일당이지."


"……네?"


"하루 12시간씩 가게에 붙어 있었을 거 아냐. 주말도 없이. 그렇게 일하고 180만 원 받은 거, 그거 그냥 사장 월급 받은 거잖아. 가게는 돈 한 푼도 못 번 거라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저기 저 반짝이는 냉장고, 그거 공짜로 들여왔어? 인테리어는? 5년, 아니 3년만 지나봐. 그거 다 고철이야. 매달 그 고철이 되어가는 값은 빼놓고 계산해야 장사지. 당신 가게는 지금, 자기 몸 깎아서 당신 월급 주고 있는 거라고. 피 토하면서."


그녀의 입에서 나온 몇 마디 말은, 내가 지난 10년간 배워온 모든 경영학 이론과 데이터 분석 기법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망치와도 같았다. 감가상각.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회계 용어가, 날카로운 현실의 비수가 되어 심장에 박혔다.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내 가게는 돈을 벌고 있는 게 아니었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나라는 기생충에게 피를 빨아 먹히면서.


"젊은 양반, 장사는 말이야. 오늘 얼마를 버느냐가 아니라, 5년 뒤에도 이 자리에서 문을 열 수 있느냐를 계산하는 거야."


박서연 사장님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시금치를 무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나에게는 관심 없다는 듯이.


나는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뺨에 와 닿았다. 나는 길 건너편에서 내 가게를 바라보았다. 환한 조명 아래, 반짝이는 새것의 기물들. 저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내 가게가 아니라,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는 모래성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래성의 꼭대기에서, 왕처럼 앉아있다고 착각했던 어리석은 피에로였다.



4화에서 계속......




레스토랑의 애환을 연구하고 희망을 스토리텔링합니다.
골목길 컨설턴트: ikjunj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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