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외식정보=진익준 작가]

‘서연이네 반찬’의 낡은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마감 시간이었다. 나는 차마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김 서린 유리창 너머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만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패배감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이 초라한 패배를 굳이 고백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돌아서려던 순간,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박서연 사장님이 음식물 쓰레기통을 들고 나오다 말고, 어둠 속에 서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놀란 기색도 없이, 그저 담담하게 물었다.
“안 들어오고 뭐 해.”
가게 안은 텅 비어 있었지만, 따뜻한 온기와 맛있는 냄새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나는 마치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작은 테이블 앞에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저… 가게, 내놨습니다.”
어렵게 뱉어낸 내 말에, 그녀는 뜨거운 물에 행주를 헹구며 대꾸했다.
“그럴 줄 알았어.”
그 목소리에는 비난도, 동정도 없었다. 마치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겨울이 오면 눈이 내리는 것처럼 당연한 결과를 이야기하는 듯했다.
“제가 뭘 잘못한 걸까요. 데이터도 분석했고, 누구보다 성실하게 매장을 관리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왜…”
내 목소리 끝이 서럽게 떨려왔다. 지난 1년간의 고생이, 억울함이 북받쳐 올랐다.
그녀는 젖은 손을 앞치마에 쓱 닦더니, 가게 구석의 낡은 찬장에서 빛바랜 노트 한 권을 꺼내 내 앞에 툭 던졌다. 노트 표지에는 ‘서연이네 레시피’라고 적혀 있었다.
“내 전 재산이야. 한번 들춰봐.”
나는 홀린 듯 노트를 펼쳤다. 첫 장에는 ‘소고기 장조림’ 레시피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일반적인 조리법 아래, 다른 글씨체로 깨알 같은 메모들이 덧붙여져 있었다.
103동 김 대리님 댁: 아이들이 먹을 거니, 꽈리고추는 빼고 메추리알 듬뿍.
상가 박 할머니: 짜게 드시면 안 되니, 간장은 반만. 대신 표고버섯으로 감칠맛.
새댁 유치원 선생님: 단짠단짠 좋아함. 올리고당 한 스푼 추가.
다음 장도, 그다음 장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레시피 아래에는 이 동네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의 입맛, 그리고 그들의 사소한 이야기들이 훈장처럼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레시피 북이 아니었다. 지난 20년간 그녀가 온몸으로 축적한, 이 동네 사람들의 삶에 대한 가장 정밀하고 따뜻한 ‘빅데이터’였다.
박 사장님은 내 어깨너머로 노트를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레시피는 본사에만 있는 게 아니야. 당신 가게를 찾는 손님들, 이 동네 사람들 머릿속에도 있지. 그걸 읽어내고, 내 손으로 다시 써 내려가는 게 사장 일이야.”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의 가장 큰 실수는 ‘데이터’를 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엉뚱한 데이터를 보고 있었다. 나는 본사가 내려준, 죽어있는 과거의 데이터를 분석하며 미래를 예측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창밖에 살아 숨 쉬는 현재의 데이터를, 사람들의 얼굴과 삶을 읽어내며 매일 새로운 내일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관리자’가 되려 했지만, 본사의 시스템을 관리했을 뿐, 내 가게와 내 손님을 관리하지 못했다. 나는 ‘경영자’를 꿈꿨지만, 나는 내 가게의 주인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본사의 레시피를 우리 동네에 배달하는 배달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고요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나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됐어. 그런 건.”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무심한 옆모습에서, 나는 말보다 더 깊은 위로를 느꼈다.
가게를 나서는 내 발걸음은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나는 내 가게로 돌아가, 유리문에 붙여 놓았던 [점포 임대 문의] 종이를 망설임 없이 떼어냈다. 종이가 찢어지며 ‘쩍’하는 소리가 났다. 마치 내 안의 낡은 껍질 하나가 부서지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밀리언즈 키친’의 간판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가게 안의 풍경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나는 본사에서 내려온 화려한 메뉴 포스터들을 모두 떼어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어젯밤 꼬박 새워 고민한, 내 생애 첫 번째 ‘진짜 사업 계획’을 붙였다.
창고에서 꺼낸 작은 칠판에, 나는 서툴지만 정성껏 글씨를 썼다.
[민준이네 오늘 저녁 국거리]
어제 마트에서 세일하던 싱싱한 무와, 제가 직접 맛보고 고른 한우 양지를 듬뿍 넣었습니다.
맵찔이 아이들을 위한 ‘순한 맛’도 준비했습니다. (주문 시 말씀해주세요!)
제 레시피가 궁금하시다고요? 얼마든지 알려드립니다. 사장인 제가 직접 끓여보고 찾아낸, 가장 맛있는 황금 비율이니까요.
아직은 초라했다. 본사의 번드르르한 디자인에 비하면 볼품없는 낙서 같았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온전한 나의 것이었다. 나의 고민과, 나의 선택과, 나의 책임이 담긴 첫 번째 레시피였다.
가게 문을 열자,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앞치마를 고쳐 매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쿰쿰한 멸치 냄새 대신, 시원하고 맑은 무 냄새가 가게 안에 퍼져나갔다.
창밖으로, 옆 가게 문을 열던 박서연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내 가게 앞 칠판을 잠시 바라보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아주 희미하게,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나는 그 미세한 표정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내 새로운 시작을 향한, 가장 따뜻하고 믿음직한 응원이었다.
나의 가게는 아직 생존하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 처음으로, 진짜 ‘살아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의 레시피로, 나의 이름으로.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