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나는 이 거리를 설렘으로 걸었다. 상가마다 붙은 ‘임대 문의’ 딱지를 보물찾기라도 하듯 훑으며, 이곳에 내 가게가 생긴다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했다. 퇴사 전 동료들은 “혁아, 너 정말 대단하다. 용기가 부럽다”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 격려와 부러움 섞인 시선이 나를 지탱하는 자부심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사실은 적자야. 한 달 내내 일하고도 내 월급은커녕 빚만 늘었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실패는 부끄러웠고, 부끄러움은 고독을 불렀다.
얼마나 걸었을까. 번화가에서 몇 블록 벗어난, 낡은 다세대 주택들이 어깨를 맞댄 좁은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대부분의 불빛이 꺼진 거리에서, 유일하게 온기를 품은 작은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심야식당, 해답(解答)]
‘해답’이라니.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단어 아닌가. 마치 나를 위해 켜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희미한 불빛에 홀린 듯 낡은 나무 문을 밀고 들어갔다.
딸랑-.
정겨운 풍경 소리와 함께, 콧속으로 깊고 따뜻한 멸치육수 냄새가 스며들었다. 가게 내부는 ‘ㄷ’자 형태의 낡은 목재 카운터와 예닐곱 개의 의자가 전부였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인 듯 정갈하고 차분한 공기가 흘렀다.
카운터 안쪽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서른 중반쯤으로 보이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무언가에 집중한 듯, 도마 위 무를 일정한 간격으로 썰어내고 있었다. 서걱, 서걱, 서걱. 고요한 가게 안을 채우는 칼질 소리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어서 오세요.”
나를 발견한 그녀가 칼을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꾸밈없는 목소리였지만, 시선은 날카로웠다. 마치 내 행색과 표정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을 읽어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혼자입니다.”
“편한 곳에 앉으세요.”
나는 가장 구석 자리에 몸을 구겨 넣었다. 그녀는 따뜻한 보리차 한 잔을 내 앞에 놓아주었다. 메뉴판은 따로 보이지 않았다.
“혹시… 뭐 파는 곳인가요?”
“그날그날 다릅니다. 손님이 원하는 걸 만들어 드리기도 하고요.”
그 말에 울컥, 설움이 치밀었다. ‘내가 원하는 것.’ 지금 내가 가장 원하는 건 이 지독한 현실을 바로잡아 줄 명쾌한 해답이었다.
“소주 한 병이랑… 아무거나, 국물 있는 걸로 부탁합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익숙한 손놀림으로 작은 냄비에 육수를 붓고 어묵 몇 개와 썰어둔 무를 넣었다.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어묵탕 한 그릇과 소주 한 병이 내 앞에 놓였다. 따뜻한 국물 한 숟갈에 얼어붙었던 몸이 녹아내리자, 굳게 닫아두었던 감정의 둑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사장님은… 장사 잘 되시나 봐요.”
“그럭저럭요.”
“저는 망했습니다. 완전히요.”
혼잣말처럼 시작된 하소연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대기업을 때려치운 용기, 오픈 한 달 만에 웨이팅이 걸렸던 뿌듯함, 월 매출 3천만 원이라는 빛나는 숫자, 그리고 마지막에 마주한 마이너스 통장까지. 나는 마치 억울한 죄인이 된 것처럼, 혹은 배신당한 연인처럼 분노와 슬픔을 토해냈다.
그녀는 그저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가끔 내 빈 잔에 술을 채워주거나, 어묵을 더 넣어줄 뿐, 어떤 위로나 섣부른 조언도 하지 않았다. 내 모든 푸념이 끝나고 가게 안에 다시 침묵이 흘렀을 때,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엑셀 파일, 지금 볼 수 있습니까?”
“네?”
“사장님 가게의 손익계산서 말입니다.”
나는 의아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노트북을 꺼내 그녀에게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녀는 카운터 밖으로 나와 내 옆 의자에 앉았다. 희미한 조명 아래, 그녀의 눈빛이 스캐너처럼 화면 위 숫자들을 훑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보다 오랫동안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술기운에 희미해지는 눈으로 그녀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동정도, 비웃음도 없었다. 마치 의사가 환자의 차트를 분석하듯, 지극히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선이었다.
“음…”
한참 만에 그녀가 나지막한 소리를 냈다.
“사장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네… 뭐, 헛수고한다는 뜻이잖아요.”
“맞습니다. 지금 사장님이 딱 그 짝입니다. 사장님은 저수지에서 물을 퍼 와 독을 채우는 데만 온 힘을 쏟고 있어요. 저수지에서 퍼 오는 물의 양, 그게 바로 ‘매출’이죠. 삼천만 원어치의 물을 퍼 왔으니, 독이 가득 찰 거라 믿었을 겁니다.”
그녀의 손가락이 식자재 원가율 55.8%가 찍힌 셀을 정확히 가리켰다.
“그런데 이 독에는 아주 커다란 구멍이 나 있습니다. 물을 붓는 족족 절반 이상이 그대로 새어 나가고 있어요. 이게 ‘원가’라는 구멍입니다. 심지어 독 전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실금이 가 있어서, 남은 물마저 야금야금 빠져나가고 있죠. 그게 ‘고정비’라는 실금이고요.”
그녀의 비유는 너무나 직설적이고 아팠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장님은 독에 물이 차지 않는 이유를 ‘물을 충분히 붓지 않아서’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음 달에는 사천만 원, 오천만 원어치의 물을 퍼 올 계획을 세우겠죠. 하지만 구멍 뚫린 독에 물을 더 붓는다고 독이 채워질까요? 아니요. 사장님 팔만 더 아플 뿐입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차분한 눈빛이 비수처럼 내 심장을 꿰뚫었다.
“사장님 가게에는 전략이 없어요.”
“……네?”
“전략이요. 비즈니스를 이끌어가는 명확한 방향성과 규칙. 그게 없습니다. 사장님은 지금 사업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누가 더 많이 퍼주나’ 하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경쟁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경쟁의 끝에는 승자가 없어요. 먼저 지쳐 쓰러지는 패자만 있을 뿐이죠.”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 전략? 나만큼 전략적인 사람이 없다고 자부했다. 대기업 마케팅팀에서 내가 했던 일이 전부 시장을 분석하고 전략을 짜는 일이었다. ‘박리다매’, ‘최고의 가성비’, ‘푸짐함’… 이것들이 모두 나의 빛나는 전략이라고 믿었다.
“제… 전략은 가성비인데요. 최고의 고기를 가장 싼값에 무한으로 제공하는…”
내 볼멘소리에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은 동의가 아닌, 안타까움의 미소였다.
“사장님. ‘싸고 푸짐하게’는 전략이 아니라, 그냥 ‘특성’일 뿐입니다. 그 특성을 가지고 그래서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에 대한 계획이 바로 전략입니다. 사장님은 그 계획이 없어요. ‘많이 주면 손님이 올 것이고, 손님이 오면 돈이 될 것이다’라는 막연한 희망만 있었을 뿐이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따뜻한 육수 한 잔을 새로 내어주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사장님 가게는 손님에게 ‘양이 많다’는 것 말고, 대체 무엇을 약속하는 곳입니까?”
나는 그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무조건 퍼주는 고깃집’이라는 내 가게의 이름처럼, 나는 그저 퍼주기만 했을 뿐, 손님에게 어떤 가치를 약속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소주 세 병을 더 비웠다. 술에 취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던진 질문에 취했다. 가게로 돌아오는 길, 새벽의 공기는 아까보다 훨씬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것은 단순히 기온 탓이 아니었다. 내 사업의 민낯, 나의 무지함이 남김없이 폭로된 뒤에 찾아온, 뼛속까지 시린 냉기였다.
제 3화에서 계속......
레스토랑의 경영과 마케팅을 연구하고 희망을 스토리텔링합니다.
골목길 컨설턴트: ikjunji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