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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우리 가게의 약속.
  • 진익준 작가
  • 등록 2025-10-31 07:42:37
  • 수정 2025-11-01 12: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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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율의 악마들이 사라지자, 밑 빠진 독의 가장 큰 구멍이 메워진 덕분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내 노동에 대한 대가, 비록 최저시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었지만, ‘월급’이라는 것을 내 통장으로 이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불안했다.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 장기적인 생존을 보장하는 신호는 아니었다.


진짜 위기는 다른 곳에서 찾아왔다. 나의 새로운 타겟, ‘김철수’들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가게 앞에 서서 그들의 동선을 관찰하는 것이 새로운 버릇이 되었다. 그들은 내 가게 앞까지 왔다가도, 길 건너 ‘샤브의 정원’의 화려한 불빛을 한번 쳐다보고는 걸음을 멈추곤 했다. 그들의 표정에는 ‘오늘은 좀 특별하게 저길 가볼까?’ 하는 유혹과, ‘아냐, 그냥 늘 가던 만만한 데로 가자’는 현실적인 고민이 교차했다. 그들은 두 가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제3의 선택지인 7천 원짜리 제육볶음 집으로 향하기도 했다.


나는 깨달았다. 나는 아직 그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지 못했다. 나는 그들에게 ‘만만한 선택지’ 중 하나일 뿐, ‘대체 불가능한 목적지’가 되지 못했다. ‘볶음밥 연구소’와 ‘라면 연구소’는 분명 재미있는 요소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내 가게의 정체성은 여전히 모호했다. 마치 회색 옷을 입은 사람처럼, 눈에 띄지도 않고 기억에 남지도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다시 유진의 심야식당을 찾았다. 이제 그곳은 내게 단순한 술집이 아니라, 길을 잃을 때마다 찾아가는 등대 같은 곳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나의 새로운 고민을 털어놓았다.


“모든 것이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타겟 고객도 정했고, 그들을 위한 가치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여전히 저를 선택하는 것을 망설일까요?”


유진은 뜨거운 찻잔을 닦으며, 늘 그렇듯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사장님. 국가에는 그 나라의 정체성과 국민에게 하는 약속을 담은 최고 법이 있죠. 그게 뭡니까?”


“헌법… 말씀이십니까?”


“맞습니다. 그렇다면, 가게의 헌법은 무엇일까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게의 헌법이라.


“……메뉴판? 아니면, 가게의 콘셉트?”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가게의 헌법은 바로 ‘이름’입니다. 가게의 이름은, 우리가 누구이며, 고객에게 무엇을 약속하는지를 담아낸 가장 짧고 강력한 선언문입니다. 손님들은 간판을 보는 그 1초의 시간 안에, 이 가게가 나에게 어떤 가치를 줄 것인지를 판단합니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장님은 이제 ‘김철수’에게 새로운 약속을 하고 싶어 합니다. ‘질 좋은 고기와 재미있는 경험’이라는 약속을요. 그런데 사장님 가게의 헌법, 그 간판에는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무조건 퍼주는 고깃집]


그 이름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랬다. 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선언해놓고, 아직도 낡은 시대의 헌법을 그대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내 가게의 이름과 내가 하려는 약속은 서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조건 퍼준다’는 낡은 약속은 더 이상 ‘김철수’에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질은 별로지만 양만 많은 곳’이라는 낡은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고객들이 내 가게 앞에서 망설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간판은 ‘양’을 외치고 있는데, 가게 안에서는 어설프게 ‘질’과 ‘재미’를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그 모호함 앞에서 고객들은 확신을 갖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던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찾았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가게로 돌아온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A4 용지 위에 수십, 수백 개의 새로운 이름을 적었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김철수의 고깃집’, ‘K대 앞 고기 아지트’, ‘가성비 육식 연구소’…


그리고 마침내, 나의 모든 고민과 새로운 약속을 담아낼 단 하나의 이름을 찾아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간판 가게에 전화해 기존 간판의 철거를 요청했다. 며칠 후, 낡고 촌스러운 ‘무조건 퍼주는 고깃집’ 간판이 크레인에 매달려 내려오는 순간, 나는 마치 과거의 나 자신과 작별하는 듯한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간판이 걸렸다.


[강혁이네 고기 연구소]


단순히 이름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낡은 메뉴판을 모두 버리고, ‘연구 보고서’라는 콘셉트의 새로운 메뉴판을 디자인했다. 첫 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강혁이네 고기 연구소는 ‘가장 맛있는 고기 한 점’을 향한 즐거운 실험을 제안합니다. 저희는 최고의 연구 재료(고기)를 제공할 테니, 여러분은 최고의 연구원이 되어 당신만의 레시피를 완성해주세요.”


메뉴는 단출했다. ‘숙성 삼겹살 연구 재료’, ‘숙성 목살 연구 재료’. 그리고 ‘볶음밥 셀프 실험 키트’, ‘해장 라면 셀프 실험 키트’가 전부였다.


아르바이트생 민수는 바뀐 간판과 메뉴판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 가게 이름이 좀… 장난 같은데요? 손님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민수야. 우리는 이제 모든 손님을 만족시키려는 욕심을 버렸어. 우리는 이제 장난 같고, 유치하고, 실험하기 좋아하는 ‘김철수’들 하고만 놀 거야. 그리고 그들에게만큼은, 이 동네에서 가장 진지하고 믿을 수 있는 연구소가 되어줄 거야.”


새로운 간판에 불이 들어왔다. 은은한 주황색 조명이 ‘강혁이네 고기 연구소’라는 글자를 따뜻하게 비추었다. 나는 더 이상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았다. 매출이 오를까, 손님이 많이 올까 하는 걱정 대신, ‘오늘 우리 연구소에는 어떤 재미있는 연구원이 찾아올까?’ 하는 기분 좋은 설렘이 마음을 채웠다.


이것은 단순한 가게 이름 변경이 아니었다.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나의 진짜 고객에게 보내는 첫 번째 러브레터이자, 세상에 단 하나뿐인 우리 가게의 헌법을 선포하는 엄숙한 의식이었다.




10화에서 계속......



레스토랑의 경영과 마케팅을 연구하고 희망을 스토리텔링합니다.
골목길 컨설턴트: ikjunj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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