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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메뉴판은 주문서가 아니다 (선택의 고통)
  • 진익준 작가
  • 등록 2026-01-04 14:11:58
  • 수정 2026-01-04 14: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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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토리로 배우는 장사

인간의 뇌는 게으르다.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고, 고민하는 것을 고통으로 여긴다.

당신의 메뉴판이 ‘논문’처럼 복잡하다면, 손님은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가장 싼 메뉴를 시키거나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국밥집 한구석, 내가 요구했던 '나만의 사무실'이 세팅됐다.


사실 사무실이라기엔 거창하고, 주방 옆 창고로 쓰던 1.5평 남짓한 공간을 치우고 중고 책상 하나를 덜렁 놓은 게 전부였다.


하지만 나는 만족했다.


벽에는 내가 전생에 그렸던 도면들이(기억을 더듬어 다시 그린 것들) 붙어 있었고, 책상 위엔 스케치북과 제도 샤프가 놓여 있었다. 무엇보다 이곳에선 가게 전체의 흐름이 한눈에 보였다. 손님이 들어와서 자리에 앉고, 주문하고, 나갈 때까지의 동선. 그것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물 같았다.


"이사님! 저... 상담 좀 부탁드려요."


오픈 준비를 하던 서은 씨가 쭈뼛거며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그게... 어제 매출은 대박이었는데, 순이익이 생각보다 안 남아서요."


그녀가 내민 장부를 훑어보았다.


매출액은 훌륭했다. 하지만 팔린 메뉴 내역을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90%가 '기본 순대국밥(7,000원)'이었다. 마진이 높은 '수육 정식(12,000원)'이나 '술국(15,000원)'은 거의 나가지 않았다.


"손님들이 다 기본만 시키네요."


"네. 다들 메뉴판을 한참 보시다가 결국엔 '그냥 순대국 주세요' 하세요. 우리 집 수육이 진짜 맛있는데..."


나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려 있는 메뉴판을 쳐다봤다.


가로 2미터짜리 거대한 아크릴 판. 거기엔 깨알 같은 글씨로 온갖 메뉴가 적혀 있었다.


[순대국밥 / 얼큰국밥 / 내장국밥 / 머리고기국밥 / 콩나물해장국 / 뼈해장국 / 수육(대/중/소) / 모듬순대 / 오징어순대 / 술국 / 전골...]


메뉴만 20가지가 넘었다. 게다가 글씨 크기도, 색깔도 전부 똑같았다.


"사장님. 이건 메뉴판이 아닙니다."


"네?"


"이건 손님에게 주는 '숙제'입니다. 그것도 아주 골치 아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메뉴판 앞으로 걸어갔다.


"손님은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수많은 정보에 노출됩니다. 낯선 냄새, 소리, 분위기... 뇌가 피곤한 상태죠.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이 난해한 암호문을 해독해야 한다면? 뇌는 즉시 방어기제를 작동시킵니다. '생각하기 싫어. 그냥 제일 위에 있는 거, 아니면 남들 먹는 거 시켜.'"


이것이 바로 '힉의 법칙(Hick's Law)'이다. 선택지가 늘어날수록 결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로그 함수적으로 증가하고, 만족도는 떨어진다는 심리학 이론.


"그럼 메뉴를 줄일까요?"


"줄이는 건 나중 문제입니다. 당장은 '시선의 고속도로'를 뚫어줘야 해요."


나는 창고에서 검은색 절연 테이프와 빨간색 매직, 그리고 A4 용지를 가져왔다.


"잘 보세요. 메뉴판에도 '골든 트라이앵글(Golden Triangle)'이 있습니다."


나는 의자를 밟고 올라가 메뉴판에 손을 댔다.


사람의 시선은 책을 읽듯이 왼쪽 상단에서 오른쪽 하단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메뉴판을 볼 때 시선은 중앙에서 시작해 오른쪽 위, 그리고 왼쪽 위로 움직이며 삼각형을 그린다.


그런데 지금 이 메뉴판은 시선이 닿는 '골든 존(Golden Zone)'에 엉뚱하게도 가장 싼 '공간 차지용 메뉴(사리 추가, 공기밥)'들이 적혀 있었다.


찌익-


나는 검은색 테이프로 잘 팔리지도 않고 마진도 적은 메뉴 10가지를 과감하게 가려버렸다. 메뉴판의 3분의 1이 검은 줄로 지워졌다.


"허억! 이사님! 너무 다 지우는 거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어차피 안 시키는 것들입니다.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이네요."


잡다한 가지치기가 끝나자, 메뉴판에 여백이 생겼다.


나는 A4 용지에 굵은 매직으로 글씨를 썼다.


[사장님 추천! 수육 정식]

(국밥 + 맛보기 수육 = 든든함 2배!)


나는 이 종이를 메뉴판의 가장 오른쪽 상단, 시선이 가장 먼저 꽂히는 위치에 붙였다. 그리고 빨간색 테이프로 종이 테두리를 둘렀다. 하얀 메뉴판 위에서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빨간색 박스. 이것은 시각적 '고정점'이자, 강렬한 유혹이다.


"자, 이제 오픈합시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손님들이 밀려 들어왔다. 첫 번째 손님인 넥타이 부대 3명이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벽을 쳐다봤다.


"어? 메뉴가 많이 없어졌네?"


"그러네. 어, 저건 뭐냐? 수육 정식?"


그들의 시선이 검은 테이프로 지워진 복잡한 글씨들을 건너뛰고, 빨간 테두리가 쳐진 '수육 정식'에 꽂혔다.


"국밥에 수육까지 주는데 12,000원이면 괜찮네. 야, 나 이거 먹을래."


"나도. 오늘 법카니까 비싼 거 먹자."


"여기요! 수육 정식 3개요!"


단 10초.


평소라면 "뭐 먹지?" 하며 3분은 고민했을 그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주문을 마쳤다. 그것도 객단가가 5,000원이나 더 비싼 메뉴로.


서은 씨가 주문을 받아 주방에 넣으며 나를 보고 윙크를 보냈다.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그 뒤로 들어온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뭐가 제일 잘나가요?"라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메뉴판이 이미 대답하고 있었으니까. "이게 주인공입니다. 이걸 드세요."라고.


복잡한 텍스트의 숲을 밀어버리고 고속도로를 뚫어주자, 손님들의 뇌는 편안함을 느꼈다. 고민하는 고통(Pain of Paying)이 사라진 자리엔 기대감이 채워졌다.


그때, 가게 문이 거칠게 열렸다.


기분 좋은 흐름을 깨는 불청객의 등장이었다.


"아이고, 정 사장! 이게 다 뭐야? 가게 꼴이 왜 이래?"


번들거리는 은색 양복을 입은 중년 남성. 손에는 가죽 클러치백을 끼고 있었다. 서은 씨의 표정이 굳어졌다.


"김 실장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라니! 내가 말한 프랜차이즈 계약 건 생각 좀 해봤어? 아니, 그보다 가게가 이게 뭐야? 불은 다 꺼져 있고, 바닥엔 웬 거적때기를 깔아놓고... 메뉴판은 또 왜 저렇게 덕지덕지 붙여놨어? 빈티 나게!"


그는 혀를 차며 내 쪽을 힐끔 노려봤다. 나를 알바생 정도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정 사장, 내가 말했잖아. 우리 '대박 기획'에 맡기면 싹 뜯어고쳐 준다니까? 요즘 트렌드가 뭔지 몰라? 화이트 앤 골드! 샹들리에 딱 달고! 메뉴판도 전자식으로 싹 바꾸고!"


그는 전형적인 '업자'였다. 유행 지난 화려한 인테리어를 비싸게 팔아먹고, 가맹비나 챙기는 하이에나. 전생의 나도 싫어했던 부류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 '화이트 앤 골드' 하려면 견적이 얼마나 나옵니까?"


"어? 당신은 뭐야? 뭐... 평당 300은 잡아야지. 15평이니까 4,500만 원?"


4,500만 원. 서은 씨 같은 영세 상인에겐 빚을 내야 하는 큰돈이다.


"그 돈 들여서 전자 메뉴판 달면, 매출이 얼마나 오르나요?"


"아니, 이 사람이! 가게가 예뻐지면 손님이 오는 건 당연한 거지! 지금처럼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해놓으면 오던 손님도 도망가!"


"도망간다고요?"


나는 매장을 가리켰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가는데도 만석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테이블엔 비싼 수육 접시가 놓여 있었다.


"손님들은 예쁜 메뉴판을 보러 오는 게 아닙니다. 빨리 고르고 빨리 먹고 싶어서 오는 거죠. 당신이 말한 그 전자 메뉴판, 화면 넘어가는 데 3초씩 걸리죠? 어르신들은 그거 조작하다가 화나서 나갑니다."


"뭐, 뭐라구?"


"그리고 당신이 말한 '화이트 앤 골드'. 국밥집에서 그게 어울린다고 생각합니까? 국밥은 서민 음식입니다. 너무 고급스러우면 심리적 진입 장벽이 생겨서 못 들어옵니다. '비쌀 것 같다'는 공포를 주거든요. 그게 바로 '공간의 배신'입니다."


내 말에 주변 식사하던 손님 몇몇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김 실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너... 너 뭐 하는 놈이야? 인테리어 좀 안다고 까부는 거 같은데, 너 어디 소속이야?"


나는 피식 웃으며 내 낡은 명함을 꺼내 그의 양복 주머니에 꽂아주었다.


"여기 소속입니다. <서울 국밥> 전속 디자이너."


"두고 보자! 네놈들, 나중에 울고불고 매달려도 안 도와줄 거야!"


김 실장은 씩씩거리며 쫓겨나듯 가게를 나갔다.


서은 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봤다. 눈에 존경심이 가득했다.


"이사님... 진짜 멋있었어요. 저 사람 매번 와서 가게 촌스럽다고 무시했거든요."


"촌스러운 게 아닙니다. '클래식'한 거죠. 국밥은 국밥다워야 가장 힙한 겁니다."


나는 매직으로 쓴 '수육 정식' 종이를 툭 쳤다.


"보세요. 디자인이 투박해도, 핵심만 찌르면 통합니다. 인테리어든 메뉴판이든 결국 본질은 하나예요. 손님의 뇌를 편하게 해주는 것."


오늘 점심, 우리는 테이프 몇 조각과 종이 한 장으로 매출을 30% 올렸다.


이것이 바로 디자인의 힘이다. 돈을 바르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것.


창고 사무실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스케치북을 폈다. 국밥집은 이제 궤도에 올랐다. 다음 단계가 필요했다.


이 골목 상권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그림.


그때, 내 낡은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 표시 제한.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차이현 씨?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 잊을 수 없는, 느끼하고 오만한 목소리.


강민석이었다. 전생의 라이벌이자, 업계 1위 '더 하이'의 대표.


-재미있는 소문이 들려서요. 국밥집에서 마법을 부리는 친구가 있다던데. 혹시... 우리 회사 면접 보러 올 생각 없어요?


나는 조용히 웃었다.


드디어 미끼를 물었구나.


"면접이라뇨. 스카우트 제의라면, 제 연봉은 좀 비싼데. 감당 되시겠습니까?"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차이현의 경영 인사이트]


Q. 왜 골목길 컨설턴트는 메뉴를 줄이라고 할까?


장사가 안되는 가게일수록 사장님은 불안한 마음에 자꾸 신메뉴를 추가합니다. "김치찌개 안 먹으면 돈가스라도 먹겠지"라는 심리죠. 하지만 이는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선택의 역설(Paradox of Choice)'이라고 합니다.


1. 결정 마비 (Analysis Paralysis)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잼 실험'이 유명합니다. 24종류의 잼을 진열했을 때보다 6종류의 잼을 진열했을 때, 구매율이 무려 10배나 높았습니다. 선택지가 너무 많으면 뇌는 결정을 미루거나 포기합니다. 메뉴판은 최대 7개를 넘기지 않는 게 좋습니다.


2. 시선의 골든 트라이앵글


손님은 메뉴판을 정독하지 않습니다. 스캔합니다.

  • 가운데 → 우측 상단 → 좌측 상단 순서로 봅니다.
    가장 자신 있는 주력 메뉴나 마진이 높은 메뉴를 '우측 상단'에 배치하세요. 그리고 박스를 치거나 사진을 넣어 시선을 고정시키세요.


3. 미끼 메뉴와 앵커링 효과


가장 비싼 메뉴(예: 5만 원짜리 스페셜 정식)를 맨 위에 적어두세요. 아무도 안 시켜도 괜찮습니다. 그 메뉴가 기준점(Anchor)이 되어, 그 밑에 있는 1만 2천 원짜리 메뉴가 상대적으로 저렴해 보이는 착시 효과를 줍니다.


4. 돈 기호(₩)를 지워라


가격표에 '12,000원' 혹은 '₩12,000'이라고 적지 말고 그냥 '12.0' 혹은 '12000'이라고 숫자만 적으세요. 화폐 단위가 붙으면 뇌는 '돈을 쓴다'는 고통을 느낍니다. 숫자만 있으면 단순한 정보로 인식해 주문의 저항감이 낮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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