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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건물주는 신(神)이 아니다 (앵커 테넌트의 힘)
  • 진익준 작가
  • 등록 2026-01-29 13:3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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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주는 공간의 껍데기를 소유할 뿐이다.

그 공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 안에 머무는 ‘콘텐츠’다.

스타벅스가 입점하면 건물값이 오르듯, 사람을 모으는 힘(중력)을 가진 세입자는 건물주보다 위에 있다.


[드림시티 쇼핑몰 회장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마호가니 원목 책상 뒤에는 드림시티의 오너, 강 회장이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강민석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차이현 씨. 자네가 내 아들을 건드렸더군."


강 회장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전형적인 기업 총수의 화법.


"건드린 게 아니라, 교육을 좀 시켰습니다. 아드님께서 '경영'이 아니라 '갑질'을 배우신 것 같아서요."


내 말에 강민석이 발끈했다.


"아버지! 저 자식 말 듣지 마세요. 그냥 계약 해지하고 쫓아내자니까요? 제멋대로 쇼핑몰을 헤집고 다니는 놈이에요."


강 회장은 손을 들어 아들을 제지했다. 그리고 서류 봉투를 내 앞에 밀었다.


어제 강민석이 던지고 간 [임대차 계약 해지 통보서]였다.


"자네가 푸드코트를 살린 건 인정하네. 하지만 내 아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건 다른 문제야. 이 바닥에서 건물주와 척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 텐데?"


협박이었다. 나가라는 소리였다.


보통의 자영업자라면 여기서 무릎을 꿇고 사정했을 것이다. 권리금이라도 챙겨달라고, 제발 쫓아내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웃었다.


"회장님. 착각하고 계시는 게 하나 있습니다."


"착각?"


"회장님은 지금 저를 쫓아내는 게 아니라,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려고 하시는 겁니다."


나는 품에서 준비해 온 태블릿 PC를 꺼냈다.


"이걸 보시죠. 지난 3개월간 드림시티의 유동 인구 데이터입니다."


화면에 그래프가 떴다. 바닥을 기던 그래프가 내가 푸드코트를 맡은 시점부터 수직 상승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쇼핑하러 드림시티에 오지 않습니다. '숲(The Forest)'에서 쉬고, '서울 국밥'을 먹으러 옵니다. 온 김에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보는 거죠. 제가 만든 공간이 이 죽어가는 쇼핑몰의 '앵커 테넌트(Anchor Tenant)'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화면을 넘겼다.


이번엔 텅 빈 상가들의 사진이었다.


"제가 나가면 어떻게 될까요? 저를 보고 들어왔던 손님들이 빠져나갑니다. 푸드코트는 다시 시끄러운 도떼기시장이 되고, 국밥집은 강 대표님이 만든 '짝퉁' 같은 가게들로 채워지겠죠. 그럼 손님은 끊기고, 공실률은 치솟고, 건물 가치는 폭락합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약 해지 통보서를 집어 들었다.


"쫓아내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나가드리죠. 대신, 저를 따라오는 하루 3천 명의 유동 인구도 같이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나는 통보서를 반으로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계약 해지? 좋습니다. 위약금 준비해 두십시오. 저는 짐 싸서 바로 옆 경쟁 쇼핑몰로 가겠습니다. 그쪽에서는 저한테 인테리어 비용 전액 지원에 렌트프리(Rent-free) 1년을 제안했거든요."


블러핑(허세)이 아니었다. 실제로 어제 경쟁사에서 제안이 왔다.


'중력'을 가진 자는 어디서든 환영받으니까.


순간, 강 회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장사꾼이었다. 자존심보다 이익이 중요한 사람.


아들놈의 찌질한 복수심 때문에 수백억 원의 자산 가치를 날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잠깐."


강 회장이 나를 불러 세웠다.


"아버지! 그냥 보내버리세요! 저런 놈 없어도..."


"닥쳐라!"


강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강민석이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회장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자네... 배짱 한번 두둑하군. 감히 내 앞에서 협박을 해?"


"협박이 아니라 '공간 컨설팅'입니다. 건물주님께 드리는 무료 조언이죠."


강 회장은 잠시 침묵하더니,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어. 아주 재밌는 친구야. 내 아들놈보다 훨씬 낫군."


그는 인터폰을 눌러 비서실장을 호출했다.


"비서실장, 강민석 대표 지금 당장 '더 하이' 대표직에서 해임 처리해. 그리고 지방 물류센터 관리직으로 발령 내."


"네?!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강민석이 비명을 질렀다.


"네놈이 벌인 짓거리 다 알고 있었다. 국밥집 베끼고, 가짜 뉴스 퍼뜨리고... 쪽팔려서 원. 경영자가 실력이 없으면 인성이라도 좋아야지. 바닥부터 다시 배워 와."


강 회장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차이현 씨. 자네에게 드림시티 전 층의 '공간 총괄 디렉터' 자리를 제안하지. 푸드코트뿐만 아니라, 죽어있는 3층 의류 매장, 5층 영화관 로비까지. 자네 마음대로 뜯어고쳐 봐. 예산은 무제한으로 지원하겠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강민석은 경호원들에게 끌려나가며 나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차이현!! 두고 보자!! 내가 반드시 돌아올 거야!!"


그의 절규가 멀어졌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돌아와도 소용없어. 네가 돌아올 즈음엔, 이 도시는 이미 내 중력 안에 있을 테니까.'





[새로운 의뢰: 유령이 사는 거리]


드림시티 사태가 마무리되고, 나는 명실상부한 업계의 '슈퍼 루키'로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화려한 쇼핑몰 디렉터 자리에만 앉아 있지 않았다.


진짜 공간의 힘이 필요한 곳은 따로 있었으니까.


어느 날, 창고 사무실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이메일도, 문자도 아닌 손편지.


발신인은 '성수동 염색공장 골목 상인회'.




[차이현 선생님. 저희 골목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예전엔 공장 노동자들과 주민들로 북적였는데, 재개발 소문에 젠트리피케이션이 겹치며 다들 떠나고 '유령 거리'가 되었습니다. 제발 저희에게도 중력을 선물해 주세요.]




성수동. 지금은 핫플레이스지만, 그 이면에는 소외된 낡은 골목들이 존재한다.


나는 서은 씨에게 편지를 보여줬다.


"이번엔 좀 스케일이 큰데? 국밥집도, 푸드코트도 아닌 '거리(Street)' 전체를 살리는 프로젝트야."


"와... 골목식당 같은 건가요?"


"비슷해요. 하지만 단순히 맛집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죠."


우리는 성수동으로 향했다.


현장은 처참했다. 붉은 벽돌 공장들은 문을 닫았고, '임대' 종이가 펄럭였다. 가로등은 깨져 있었고, 쓰레기가 굴러다녔다.


하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


이 낡은 벽돌 속에 숨어 있는, 엄청난 잠재력의 중력이.


[세월], [질감], [스토리].


새 건물은 흉내 낼 수 없는 '시간의 힘'이 이곳에 잠들어 있었다.


"이사님, 여기 너무 무서운데요? 다 쓰러져 가요."


"아뇨, 서은 씨. 여긴 보물창고예요."


나는 깨진 벽돌 벽을 쓰다듬었다.


"강남의 유리 건물이 '성형미인'이라면, 이곳은 주름이 멋진 '노신사'입니다. 화장을 떡칠할 게 아니라, 그 주름을 더 매력적으로 보여주면 됩니다."


그때, 골목 끝에서 낡은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걸어 나왔다. 편지를 보낸 상인회장님이었다.


"자네가... 차이현인가?"


"네, 할아버님. 편지 잘 받았습니다."


"이 늙은이들의 터전을... 살릴 수 있겠나? 요즘 젊은것들은 이런 냄새나는 골목 싫어하잖아."


나는 노인의 거친 손을 잡았다.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몰라서 못 오는 겁니다. 제가 이곳을 서울에서 가장 힙(Hip)한 거리로 만들어 드리죠.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이 골목의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낡은 간판, 녹슨 기계, 깨진 벽돌... 그게 다 돈입니다."


노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골목 입구에 섰다.


나의 [절대 공간감]이 발동했다.


회색빛 죽은 거리에 황금색 닻들이 박히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미래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재생 건축(Regeneration Architecture)'.


부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잇는 것.


이것이 나의 다음 미션이다.


"서은 씨, 준비해요. 이번엔 페인트가 아니라 '조명'과 '스토리'로 승부합니다."





[차이현의 경영 인사이트]


Q. 스타벅스는 왜 월세를 안 낼까? (앵커 테넌트의 권력)


상권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앵커 테넌트(Anchor Tenant)'입니다. 배를 고정하는 닻처럼, 상권의 유동 인구를 붙잡아두는 핵심 점포를 말합니다.


1. 건물주보다 센 세입자


스타벅스, CGV, 교보문고, 애플스토어. 이들이 입점하면 건물의 가치가 폭등합니다. 그래서 건물주는 이들을 모셔오기 위해 인테리어 비용 지원, 렌트프리(임대료 면제), 심지어 매출 수수료 베이스(월세 대신 매출의 일부만 냄) 계약을 맺기도 합니다. 즉, "내가 들어가 주는 게 월세"라는 배짱이 통하는 것이죠.


2. 키 테넌트 (Key Tenant)의 낙수 효과


앵커 테넌트가 사람을 모으면, 그 낙수 효과(Shower Effect)로 주변의 작은 가게들도 살아납니다. 당신의 가게가 작더라도, 그 지역에서 '대체 불가능한 매력(맛집, 포토존)'을 가진다면, 당신도 건물주에게 큰소리칠 수 있는 '소형 앵커'가 될 수 있습니다.


3. 콘텐츠가 곧 부동산이다


과거에는 '입지(Location)'가 최고였지만, 지금은 '콘텐츠'가 입지를 만듭니다. 산꼭대기에 있어도, 골목 구석에 있어도 매력적인 공간(콘텐츠)이 있다면 사람들은 찾아갑니다.


"건물주 눈치 보지 마세요. 손님이 찾아오는 힘(중력)만 있다면, 건물주가 당신 눈치를 보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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